5. 까짓것 우울하면 좀 어때?
5. 까짓것 우울하면 좀 어때?
김승기(시인, 김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사람은 태어나서 ‘엄마’라는 이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생을 시작합니다.
‘엄마’의 젖을 먹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되는데, 그 엄마라는 존재는 아기에게 가장 안전하고 믿음을 주는 ‘애착’의 대상이 됩니다.아기는 이때 처음으로 친밀한 관계 형성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을 발판 삼아 친밀한 관계를 주위로 확대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인 ‘자아’의 형성이 시작됩니다.
©Artranq,출처 envato elements
그러나 엄마는 전적으로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아이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인 분리 불안을 야기합니다. 아이는 나름대로 엄마 대신 다른 대상으로 일시적인 대체를 하기도 하면서 힘겹게 이를 극복해 나갑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일 때 아이는 혼자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 다음은 초등학교! 학업이 시작되고 동기부여를 하며 성취감의 즐거움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아이의 몸은 부쩍 커지고 이차성징이 나타나며, 사춘기를 맞게 됩니다. 아주 반항적이고 감정 변화도 심하여 자신이나 부모 모두가 힘든 시기 입니다. 이는 자아 형성이라는 과업 완수를 위한 진통으로, 자아 확립이 되고서야 끝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아이는 자라서 이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는 독립된 주체가 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을 훌륭하게 마친 사람, 영광스러운 그 이름이 ‘어른’ 입니다. 그 어른은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압니다. 또 예의가 바르고 자존감이 넘치는 유쾌한 사람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기꺼이 맺을 수 있고, 사랑도 하며,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훌륭한 부모가 됩니다.
이것이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성공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주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 문제의 세세한 단편들이 이 책의 내용들입니다.
· 당신의 자존감은 안녕하신가요?
(누군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여자, 집착하는 사람들, 자존심이 높은 남자, 자존감이
낮은 여자, 페르소나, 남의 눈빛 하나에도 우울해지는 의대생, 어른들의 사춘기)
· 자라나지 못한 마음 속의 아이들
(마음속의 아이들, 아이가 너무 어수선해요, 엄마는 내 여자, 휴지 빼주는 남자, 사춘
기는 없으면 안 되나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 31번째 남자)
· 상처받기 쉬운 가족이란 울타리
(착한 여자 증후군, 형제는 왜 싸우는가?, 형제는 사랑하지 않는다, 센티멘털 박, 혼자
밥 먹는 남자, 그녀의 겨울)
·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
(결혼의 조건, 사이-거리는 존중되어져야 한다, 섹스라는 것, 닫아버린 성(性), 날마다
페니스에 이름 쓰는 여자, 유쾌한 이혼, 필리핀산 행복, 죽지도 못하는 여자, 스토커를 만
나면?, 술만 마시면 180도 달라지는 사나이)
· 장애와 통증 사이
(중독으로 들어가는 문, 경계가 많은 사람들, 숨 막히는 두려움, 마음에 드리운 긴 그
림자, 사람을 대하는 게 불편하고 두렵다, 누구에게나 '불안'은 있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저 환자 왜 왔나요?, 이유 없이 잠 못 이루는 밤, 신경 쓰면 누구나 머리가 아프다, 밤낮없
이 머리가 아파요, 사랑도 지울 수 있다면, 다정한 친구)
이 책의 소제목들인데, 그 주인공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떠올려 봅니다.
그래, 지금은 어떠신가요? 아직도 그때처럼 힘드신가요?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스트레스란 ‘나와 세상’, 더 자세히 말하면 ‘나의 욕심과 세상 욕심’의 불협화음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성장 환경이 열악하여 ‘나’가 취약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발달상의 문제를 갖고 있어 면담 몇 번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자라지 못한 아이들을 다독거려야 하는 심층적 면담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맞닥뜨려온, 맞닥뜨리고 있는 환경인 ‘세상’은 너무 버겁습니다. 손쉽게 조절-변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여전히 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힘든 나날을 보낼 확률이 높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은 월요일. 주말에는 휴진이어서 환자가 제일 많은 날입니다. 우리 병원은 환자가 많은 편이라, 오후가 되면 버겁게 느껴져 재래시장통을 한 바퀴를 돌고 옵니다. 의사 중에 자살률이 제일 높은 의사가 누군지 아시나요? 흡연율이 가장 높은 의사는? 모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너무 힘든 일들에 간접적으로 노출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일종의 산재(?)인 셈입니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유난히 우울해지고 힘든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찾아갈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자가 치료밖에 할 수 없고, 이날은 나의 단골집인 하이퍼 횟집을 찾아야 하는 날입니다.
집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하이퍼 들렀다 갑니다.”
초밥이 특히 일품인 하이퍼 횟집은 회를 뭉텅뭉텅 썰어주고, 그 두껍게 썰은 회로 밥을 싸서 줍니다. 입 안 가득 씹히는 포만감! 초밥 하나 시키고 주방 앞의 허름한 나무 스탠드에 앉아 따끈한 정종을 천천히 마십니다. 앞에서 요리중인 셰프이자 주인인 칠순의 아주머니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우울감은 가시고, 나는 다시 씩씩하게 집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별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까짓것 우울하면 좀 어때?
- 2019년 봄, 수연재에서 김승기
지은이 김승기는 ‘휴지 빼주는 남자’로 불린다. 매일 병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환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옆에 앉아 그들의 젖은 눈을 위해 티슈를 빼주곤 한다. 가끔 시를 쓰고,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술을 마신다.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하며 2003년 시전문지 《리토피아》로 등단하여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정신과 전문의 김승기 시인의 자존감 처방전'- 『우울하면 좀 어때』를 출간했다. 시인축구단 <글발>의 주치의이며 한국정신분석학회 정회원, 김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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