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착한 여자 증후군
김승기(시인, 김신경정신과의원 원장)
©stevanovicigor, 출처 Envato Elements
30대 초반의 J, 그녀가 감당 못할 눈물을 터트렸다. 나중엔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휴지를 빼서 건네주고, 그 울음이 다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 하소연하듯 말했다.
“결혼해서 얼마 안 있어 다짜고짜
큰 시누이가 열여덟 살 된 고등학생 조카를 집에 데리고 왔어요.
저와 한 마디 얘기도 없이 남편이랑만 상의한 시누이도 밉고,
누구보다 남편이 미웠지만,
항상 참고 견디며 나름대로 잘 해주려 노력하며 몇 년을 같이 살았어요.
남의 식구, 그것도 다 큰 조카와 신혼 부부가 같이 한집에서 살자니 불편했고,
가끔 싫은 소리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시누이가 뒷말을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 조카가 대학 입학하여 서울로 가고 나니,
얼마 전에 또 막내 시누이가 사생아인 네 살 된 여자애를 집에 데리고 온 거예요.
아이는 종일 TV를 보고 말도 안 듣고 속을 썩였어요.”
그녀가 겪은 억울한 얘기들은 끝이 없었다. 시댁 식구들은 자신을 무시하고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기도 해서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다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서 늘 자기
주장만 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사람들을 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자신이 밉다”라고 했다.
흔히 말하는 ‘착한 여자 증후군’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착하다는 반응을 듣기 위해, 자신의 욕구나 소망을 억제하는 행동이나 말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행복은 결국 자신의 욕구나 소망이 충족될 때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예의 환자처럼 거절을 못해 하기 싫은 일을 다 떠안게 되고, 마음속에 피해 의식과 분노감, 우울감이 자리잡게 된다. 당연히 불행한 나날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도 항상 그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참 잔인한 구석이 있다. 이런 사람들 옆에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남을 힘들게 하면서도, 속으론 바보 취급을 하고, 또 어쩌다가 자기 요구를 거절하면 나쁜 사람으로 몰고 가며 욕을 하기도 한다. 환자 J도 마찬가지다. 좋은 일은 다 해주고 억울한 소리는 다 듣고 있다.
면담 중 이야기를 듣는 나도 화가 날 정도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그렇게 거절을 못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까? 그것은 심리적으로 남에게 나쁘게 보이는 것이 두렵고, 착하게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불안해진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안해지나? 어려서 생긴 콤플렉스로, 자신이 버려져 보호받지 못해 생존할 가능성 없다는 유기(遺棄)의 공포가 무의식적으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이를 정신분석에서는 분리불안이라 하는데, J 그녀의 내면에도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릴 적 그녀의 부모님은 허구한 날 싸웠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늘 화를 냈다. 그런 부모와 집이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삼
남매 맏이인 자기가 우는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아이들이 처하면 어떨까? 아마 두 가지 방향이 있을 것이다.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며 불량아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지키려고 어떻게든지 잘 보이려 할 것이다. 그녀는 후자의 길을 택했고, 그녀의 부모가 요구하는 착한(?) 아이가 어떻게든지 되려 했다. 그리고 ‘내가 반듯해야 동생들도 따라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말아서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착하고 모범스럽다는 건 무엇인가? 학교와 사회, 부모나 선생님이 요구하는 타자의 가치관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내면엔 ‘그녀 자신’이 없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성격으로 굳어져,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자신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런 자신이 밉다, 제발 우리를 가만 놔두었으면 좋겠’단다. 이런 그녀를 가족 중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도 못하다. “남편도 미워 죽겠어요. 이제는 세상이 무섭고 사는 게 막막해요. 그냥 우리만 살게 놔두면 되는데…”
그래도 나는 남편과 면담을 요청해 봤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고 주위의 부당한 요구를 막아주며, 그녀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남편은 오지 않았고,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없었다. 그녀의 내면에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분리불안>과 이차적으로 생긴 <모범생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J 그녀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은 너무나도 견고했고, 아주 많은 시간과 휴지가 필요할 것 같다.
처방전
우리 사회는 무조건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착해야 하고, 친구 형
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아주 잘 따라서 자란 사람들이
소위 모범생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훗날에도 사회생활을 잘하고 더 행복할
까요? 한 마디로 No입니다. 덕지덕지 쓰고 있는 남의 자아(페르소나)를 벗어
내려 혹독한 사춘기를 겪어야 하고, 미처 다 벗어던지지 못한 상태라면, 칭
찬만 받다가 그렇지 못할 때 쉽게 열등감에 빠져 남의 시선에 전전긍긍하는
자존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은이 김승기는 ‘휴지 빼주는 남자’로 불린다. 매일 병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환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옆에 앉아 그들의 젖은 눈을 위해 티슈를 빼주곤 한다. 가끔 시를 쓰고,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술을 마신다.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하며 2003년 시전문지 《리토피아》로 등단하여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정신과 전문의 김승기 시인의 자존감 처방전'- 『우울하면 좀 어때』를 출간했다. 한국정신분석학회 정회원, 김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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