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고, 저녁 즈음이 되어 깨었다가, 점심이 돼서 잠들고를 반복하다 보니 중간에 하루쯤은 사라진 것도 같다.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 잘 알 수 없는 날들이다.
기약이 아주 없지는 않은 반백수의 날이 지속되면서 미뤄뒀다가 하려던 일들을 조금씩 하고, 그러다 잡다한 일들이 산더미가 되어 뒷수습을 하고 나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있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아침과 밤의 경계를 어떻게든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애쓰다 결국 새벽 3시쯤 눈을 뜬 어느 날의 새벽. 산책을 하기로 했다.
새벽 5시 반,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맡지 않은, 차고 파란 공기를 깊숙이 마셔본다. 첫눈이 쌓인 날, 새하얀 눈밭에 처음으로 내 발자국을 새겨 넣는 소소한 기쁨에 맞먹는 기분으로.
침묵하는 경기도 외곽, 작은 동네의 새벽엔 한참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암탉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농장 같은 것이 근처에 있는가 보다.
요즘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사라지고 한다. 전쟁과도 같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선한 사람은 아닌 나는, 그럼에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질색하는 편이라, 나만 아니면 된다거나, 나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는 그 마음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마음이 복작복작하다. 화가 났다가는, 억울함도 오고, 그러다 슬프기도 하고, 결국 내가 더 조심하면 되지 뭐 하고 체념한다. 이 새벽, 사람이 지나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도 마스크를 내려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올려 쓰고 있는데, 나는.
이 지경이 되고 나니 한층 더, 푸른 하늘이 고맙고, 돌계단 사이에 힘차게 피어난 들꽃이 아름답다. 매일을 살아낼 집이 있고, 기다리면 돌아갈 수 있는 일이 있고, 함께 위로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이 감사하다. 혼자일 때의 일상도 외롭거나 서럽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함께이고 나니 이것이 소중함을 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 일상을, 들풀들을, 나무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참을 이렇듯 온갖 상념과 잡념과 푸념에 휩싸여 걷다 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다. 언제나 이렇다. 시간은 내 마음의 속도보다 항상 조금 더 앞서 가 있다.
이젠 멈추었나 싶었던 암탉이 또 한 번 울기 시작하고, 거멓던 하늘이 조금씩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하늘 쪽으로 올려다보던 시선을 길 위로 방향을 틀어 본다. 아직 제대로 아침이 오지 않은 새벽녘의 보도블록은 푸른빛을 낸다. 아직은 제빛을 발하지 않는다.
잠깐 흩날리듯 불어온 바람에 비니 밖으로 삐져나와 있던 머리칼 몇 올이 흔들려 얼굴을 간질인다. 아직은 바람이 차다. 새벽의 산책은 아직 조금 더 봄이 완연해지면, 그래, 조금 더 따뜻해지면.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느새 하늘이 어둠을 거의 걷어낸 6시, 아파트 단지의 바깥을 둘러싼 울타리를 따라 돌아가는 길에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닥으로 떨구었던 고개를 쳐들어 봐도 새를 찾아볼 수가 없는데, 금세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지저귀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가만 보니 울타리 안쪽으로 주욱 둘러 심어져 있는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 불협화음을 내는 합창단처럼 조금씩 엇박자로 내는 지저귐 들은 나무에 다가갈수록 우렁찬 소리가 되어 귀에 가득 찬다. 새가 지저귀는지 나무가 지저귀는지 잘 모르겠다. 실체를 볼 수 없는 그 소리는 그냥 공기가 내는 소리인 것도 같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라,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층계를 지난다. 강아지와 이른 아침의 산책을 하고 있는 어르신을 지나쳤다. 아직 성견은 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그 작고 귀여운 생물체는 자기 발걸음을 쫓아오지 못하는 할머니를 저만치 앞서서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 잠시 기다리고, 달려가다 뒤돌아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어젯밤 중요할 거 하나 없는 드라마를 보면서, 같이 보고 있는데도 왜 내용을 이상하게 이해하시느냐며 엄마에게 툭 내던진 말이 떠오른다. 이미 할머니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도, 딸에게 이해받고, 배려받아야 할 터인데. 왈칵. 나의 가혹함에, 미안함이 쏟아져 내린다.
501동 입구 앞, 새벽의 찬 공기에 저도 푸른빛을 띠던 벚꽃이 아침 햇살에 조용히 분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본다. 주변을 살피고 몰래 가지 끝을 5센티미터 정도 끊어내고, 미안하다 작게 소리 내어 사과도 한다. 활짝 핀 벚꽃 다섯 송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약한 힘으로 가지를 붙들고 있다. 그래도, 꽃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선물해야지 한다.
12th April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