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의 삶

by Bluese


비슷비슷해 보이는 초록색 빛을 반짝거리며 진열되어 있는 병들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전혀 비슷하지 않지- 하며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으로 골라 집는다. 오늘은 너다, 소주.

소주엔 말간 황도 -얼음도 깔아 간간히 국물도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나 과일 종류가 좋은데, 오늘은 왠지 짭조름한 감자칩에 손이 간다. 소주와 감자칩이 들어 바스락거리는 봉투를 달랑달랑 손에 쥐고 흥에 겨운 걸음으로 집으로 간다. 왜 그런지 술을 사들고 들어갈 땐 조금 신이 난다.




술이 참 좋다.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넘어서 위까지 자리 잡는 과정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다. 이 맛을 가장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단연 위스키인데, 특히 싱글 몰트 위스키가 좋다. 그중에서도 부드럽게 잘 빠진 삼각기둥의 병이 예쁜 동그란 상자에 들어 있는 G사의 것을 좋아했다. 돈을 고민 없이 쓰고 다니던 시절에, 15년 산을 집 근처 바에 킵keep 해놓고 더도 말고 딱 한 잔 씩, 온 더 락스on the rocks 로 홀짝거리고 귀가하는 것을, 마치 멋진 커리어 우먼에 걸맞는 하루의 마무리처럼 생각했었다 푸훗. 그렇다 보니 집에도 여러 종류의 예쁜 온 더 락스 잔들과 동그랗게 얼음을 얼리는 몰드가 있었는데 나는 검은빛이 도는 얇지만 튼튼한 유리로, 잔의 바닥 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지며 예쁜 굴곡을 그리던 잔을 가장 좋아했다. 단단히 잘 얼린, 잔에 꼭 맞는 동그란 얼음을 넣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쪼로록 따르면, 아주 작게 빠작 빠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얼음에 작은 균열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이 좋았다. 오감 중에 네 개나 채워주는 아주 만족스러운 한 잔이었다.


photo by SU - 내용과는 관계없는 blue sapphire @Constellation, Shanghai

많이들 다른 술로 시작하다가, 인생의 말년엔 위스키지 하는 느낌인데, 난 조금 빨리 위스키에 맛을 들이고, 빨리 시들해져 버린다. 깊고 진한 위스키를 제치고 내 사랑이 된 것은, 칵테일.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이 뭐냐고 물으면 고민 없이 코스모폴리탄을 말한다. 아마 영어 공부를 하며 봤던, 뉴욕 여자들이 네 명 나오는 드라마에서 알고, 맛을 봤다가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정 브랜드에서 에디션으로 나오는 예쁜 병들을 모으기도 했을 만큼 보드카를 좋아해서, 보드카 베이스에 상큼한 주스들이 믹스된 맛이 마음에 쏙 든다. 둘째로는 블랙 러시안을 좋아하는데, 보드카 베이스에 내 사랑 커피맛 깔루아까지, 내 두 가지 기호식품들을 동시에 즐길 수 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집에 몇 가지 리큐르liqueur 를 쟁여놓고, 친구들이 왔을 때 한 잔 씩 내어주는 재미도 쏠쏠하게 맛봤다.




사실, 좋아하지 않거나, 좋아해 본 적 없는 술은 별로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알콜릭alcoholic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급 공손 - 요즘은 한 달에 서너 번 마시고 있어요.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술이 주는 만족감과 동등하게, 함께하는 이들과의 감정교류를 좋아하기 때문 이기도 하다. 술을 앞에 놓으면 왜일까, 인간은 힘이 풀린다. 그래서 '밥 한 끼 하자' 라는 말과 '술 한 잔 하자' 라는 말은 확연히 다르게 느낀다. 당신과 뾰족함 없이 편한 대화가 하고 싶다는 초대를 받는 기분.


이상형을 물으면 근육질의 남자라고 수도 없이 말했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나의 남자는 말랑말랑한 팔을 가지고 있어서,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은지 6년이나 됐다. 뭐, 그것 말고도 사람의 어떤 면이 좋거나, 존경스럽거나 해서 감정을 갖게 되는 포인트는 많은데, 이건 절대 싫어! 라고 하면 금방 떠올려지는 하나는 술 못 마시는 남자는 싫어.

물론, 술은 맥주 한 잔에 취할 만큼 못해도, 꼭 술자리에 자리 하나 꿰차고 용케 3차 4차까지 동행하는 심리적 과음을 즐기는 친구들이 몇 있어서,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기꺼이 수용할 아량은 있지만, 모든 연애의 상대들은 언제나 나와 비슷한 애주가의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은밀한 것들에 나는 단연코 둘만의 음주를 꼽는다. 이유는 생략. 요즘말로 할많하않




라이프 스타일이란 하고 있는 일이나, 만나고 지내는 사람들, 좋아하는 장소나 좋아서 듣게 되는 음악 같은 것들을 모두 반영하기에, 그 시절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애음하는 술도 같이 변화해왔다. 말랑말랑한 팔을 가진 남자 친구 덕에 재즈바를 전전하던, 한국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까지의 내 삶엔 언제나 와인이 함께였다. 화이트 보단 레드가 좋고, 너무 단 맛보단 드라이하고 목 넘김이 좋은 칠레산 카르미네carmenere - 특별히 라벨에 천사를 장착한 M사의 것 를 즐긴다. 즐긴다는 데에는 가격도 한 몫하는데, 칠레산 와인들은 꽤 저렴한 편인 가격에 비해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와인은 공부하려고 맘먹으면 몇 년도 해야 할 만큼 품종도 원산지도, 맛도 다양하기에 깊이 파고들 엄두도 못 냈지만, 어느 날 마시던 것이 너무 좋아,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추천받아 마시고,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것도 정해지고 했다.

역시 내용과 관계없는 화이트 와인 - 오래전 사진이라 어떤 와인이었는지는 기억 없음 @Dr.Wine, Shanghai


이 한적한 마을엔 오래된 친구도 없고, 새로운 일을 함께하는 분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거나 애 셋 딸린 엄마이거나 해서, 술 한 잔 하자- 불쑥 불러낼 사람이 없다. 예전엔 술만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도, 옆 테이블의 사람도, 모두가 하나 되어 친구가 되어 주었는데, 이젠 나조차 그럴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제목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플루겔혼flugelhorn 연주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며 사 온 것들을 펼친다. 그나마도 예쁜 나무로 된 쟁반에 감자칩을 플레이트씩이나하고, 오타루 여행에서 샀던 짙은 보라색 유리로 된 고급스러운 소주잔에 혼술을 한다. 요즘 내 삶엔 소주가 딱이다.


오늘 밤엔 오래전 마음이 잘 맞던 사람들과 술에 젖어 흥청망청하던 날의 꿈을 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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