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여자

by Bluese


누가 들으면 웃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난 나에게는 운동인 것을 한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와 아주 가끔 날을 잡아 걷고자 할 때 걸어 보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게, 1년에 백만 원 가까이하는 연회원권을 끊어둔 헬스장을 2주가량 열심히 다니다가 내가 그런 걸 끊어 놨었던가 싶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일이 세 번이나 있다. 몇 년 전, 허리가 안 좋아지기 전까지 신발장엔 킬힐들이 가득했고, 그런 신발을 주로 착용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듯, 걷는 일 조차도 나의 일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희망이었다고 한다면, 운동이나 걷기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는 것과 언젠가 해야 할 때가 온다면 하겠지 했었다는 것 정도.




옛날 옛날에 라고 시작해야 할 만큼 - 매우 주관적인 체감으로 - 오래전 호주에 1년가량을 가 있었을 때부터 걷기에 대한 기쁨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한참을 일 때문에 머물던 더러운 공기로 악명 높은 중국의 상하이, 그 뿌연 하늘로부터 인지, 스트레스로 부터인지 탈출을 해 도착한 시드니의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파랬다. 도시 곳곳에 힐Hill 이 가득한 도시에서 나의 힐High heel들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처박혀 있어야만 했고, 거의 유일하게 있던 까만 가죽으로 된 컨버스의 운동화만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이동시켰다.

잊을 수 없게 선명히 각인된 풍경과 너무 파랗고 맑아서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좋았던 그 하늘들. 평소에도 하늘을 쳐다보는 일을 좋아해 휴대폰엔 항상 여러 색을 품은 하늘의 사진들이 가득한데, 시드니에서는 차마 찍을 생각도 못하고 바라보기에 바빴다.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예쁜 건물과 벽과 정원들까지 더해져서, 그 시간 속의 나는 언제나 걷고 있다. 검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 친구는 호주에서 PTpersonal trainer 자격증을 따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다. 덥지만 끈적이지 않는 공기는 손을 잡고 하루 종일을 함께여도 좋을 만큼 상쾌했고, 초록으로 가득한 공원 잔디에 누워서 땀을 식히다가 잠에 들기도 하고, 그에게 억지로 이끌려 런지lunge 따위의 운동을 하기도 하면서 그 도시가 기꺼이 내어주는 기쁨을 맘껏 누렸다. 그런 생활을 시작하고 몇 달 남짓, 사진 속의 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사이, 리즈시절만큼 살이 빠져 있었다. 호오.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들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중국의 음식들은 찰떡같이 잘 맞아, 결코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관계였고, 업무 스트레스도 한몫 더해, 불과 몇 년 새 10kgs 이 넘게 살이 찌고 말았었다. 그런데 그저 몇 개월, 예쁜 풍경을 안주 삼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걸었더니 그 많던 살들이 떨어져 나갔다. 의도하지 않은 성과에 불안해진 나는, 달링 하버Darling Habour의 밤 산책도 시작한다. 은은하게 코를 메우는 바닷바람과 밤의 어둠에 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도시의 빛 아래를 걷는 기분. 세상에. 지금 생각해도 그런 호사로움은 다시 누려보지 못할 맛이다.


묘하게도 상하이로 돌아가 '일하는 여자 1' 의 역할을 맡자마자,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감쪽같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매일은 일과 야근으로 채워지고, 주말엔 술을 마시거나, 널브러져 쉬는 것에 급급했고, 신발장엔 다시 화려한 힐들이 자리했다. 물론 떨어져 나갔던 살들도 오랜만이라며, 회귀해 내 몸에 자리 잡았다.


연중행사로 들이닥치는 장염이나 때때로 독하게 앓는 감기 때문에 간 것 외에는 병원에 가는 일이 적은데, 급격하게 오른 살 덕분에 찾은 병원에서 나는 또 '걷기'라는 놈을 만난다. 발 전체를 사용해서 올바르게 걷는 일이 등의 근육을 강화시켜 허리에 좋다고, 하루에 10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20분, 천천히 시간을 늘려 걷기를 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상하이에서의 걷기는 습관이 되어주지 못했다. '치료를 위한 운동'이라는 말이 주는 괜한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더러운 공기 때문이었을까. 도무지 시드니의 그것처럼 즐길 수가 없었다.




시간은 많고, 일상의 사소한 움직임조차 확연히 줄어버린 덕에 스멀스멀 살이 올랐다. 못 본 척 방관하다, 운동 아니 걷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어디 제대로 된 짐gym 같은 곳에 갈 수는 없어, 엄마가 매일 산책하시는, 아파트 뒷산에 길게 난 산책길을 걷는다. 만보기 앱도 깔았다. 하루에 만보를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을 오랜만에 경험한다. 그래도 한참을 걷다 4,300, 6,800 올라가 있는 숫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오늘도 반드시 만보를 찍어 보이리라! 하는 대상이 없는 경쟁심으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 '걷기'의 세 번째 기회가 왔다 - 전혀 대단한 기회 같아 보이지 않겠지만.

걷는다는 것은, 뛰는 것만큼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주변의 것들에 충분히 눈길을 주게 되는 행위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천천히 곱씹고 재정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3주간 미루지 않고 했더니, 금세 3kgs 정도가 호로록 빠지고,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만족은 금물이다.

'걷기 운동하는 여자'의 역할을 꾸준히 잘 해내야만, 미션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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