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

2019년 어느 여름날의 습작

by Bluese


여름의 저녁은 길다. 오늘은 특별한 일은 없었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카페에 친구이기도 한 여사장을 만날 겸, 카페가 있는 지하에 있는 일본 마트에 갈 겸 -사는 곳이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 그나마 싱싱하고 깨끗한 채소와 과일들을 사려면 이 마트뿐이다- 한낮의 열기가 조금은 가신 늦은 오후에 슬렁슬렁 걸어 다녀왔다. 카페와 마트는 미국의 프랜차이즈 비즈니스호텔이 있는 건물의 몰mall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올림픽공원奥体公园이라 불리는 축구장, 수영장, 배드민턴장들이 있는 큰 공원의 길가에 붙어 있어,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주말이 아니래도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 바람이 선선해지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 손을 잡고 몰려나와 산책을 하거나, 폭신폭신한 우레탄으로 깔린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거나 한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를 참 좋아한다. 비명 지르는 소리는 귀가 아파 싫은데,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는 좋다. 세상 아무런 근심 걱정도 모르는 천진난만함이 잔뜩 묻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정화가 되는 기분이 든다.


귀에서는 집에서부터 들으며 온 얼 클루Earl Klugh 의 Cool 앨범이 So much in common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혼혈인지 햇빛에 반짝거리는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를 한 인형 같은 여자 아이가 예의 그 웃음소리를 내며 내 앞을 지나갔다. 선글라스를 낀 내 눈빛은 확인할 길 없었겠지만, 분명히 얼굴 가득 만연한 미소는 보았으리라. 한껏 따뜻한 기분이 되어 발길을 옮기려는데, 아이의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이 중국어 특유의 그중에서도 좀 더 파이팅 넘치는 싸움 거는 듯한 말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음악을 넘어 들려오고, 순간 눈 앞에 있던 예쁜 커튼이 걷히고 현실로 돌아오듯 나의 행복감은 확 깨져버리고 만다. 앞뒤 안 보고 뛰어다니다가 지나다니는 사람과 부딪히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내용이었는데, 아이도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의 진로를 방해한 나를 나무라는 것 같이 들려서 께름칙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나 순식간에.



7시가 다 되었을 무렵에서야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창 밖으로 믿을 수 없이 황홀한 저녁노을을 마주쳤다. 위에서부터 짙은 파란색, 노란색, 오렌지색이 제일 밑엔 짙은 와인 빛으로 변하며 선명하게 그라데이션되어 있고, 태풍이 지나 깨끗한 하늘에, 미처 다른 무리와 속도를 맞춰 지나가지 못한 큰 덩어리의 구름이 합성사진처럼 그 앞에 멀뚱 거리며 얹혀 있다. 27층인데 앞으로도 옆으로도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이 멀리 호수가 있는 공원까지 파노라마처럼 볼 수가 있어서, 꼭대기의 색부터 밑바닥의 색까지 완벽한 그림이 되어준다.


전문성도 없고, 사진 찍는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촬영용으로 선물 받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찾아본다. 어디에 두었더라. 여기였나 하며 두리번거리다, 오크나무 책장 위, 그것보다 조금 옅은 색의 액자에 눈길이 멈춘다.

재즈 피아노를 배우겠다며 코드를 몇 개 배우고는 당신의 연주가 끝난 후에 둘이 함께 앉아 나는 왼손으로 코드를 잡고, 당신은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치다 애드립adlib 으로 연주를 하다 했던 날이다. 살짝 위쪽에서 찍힌 사진이라 우리 두 사람의 표정이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건반 위에 놓인 손들 위에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눈빛의 온도를.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비대칭으로 연결되어 있는 책장, 위에서 두 번째 칸에 놓인 카메라를 찾아들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은 어느새 노을을 밀어내고 어두워져 있다. 나는 까만 방에서, 불을 켜야지 하는 생각조차 잊고 미동도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어째서일까. 아름다운 순간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찰나인 걸까.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담은 저녁 노을




카페 여사장이 곧 가게 리뉴얼을 할 거라 얘기했다. 둘이 진행 중이던 다른 일이 있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 카페를 관리하는 건 그녀만의 일이라, 내가 가타부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잠자코 있었다. 가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함께 일을 공유하는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 따윈 배제하고 저질러버리는 일들을 겪을 땐, 화가 치민다. 괜스레 회사를 다니며 일하던 때까지 떠올라 털어내듯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많이 좋아하고, 다시없게 열정적으로 했던 일이었지만, 이젠 생각만으로도 몸이 아플 정도로 진절머리를 내고 그만둬버린 일이다.


저녁을 준비하기 전에 한 잔 마시려고 내려 따라둔 커피가 어느새 식어 있다. 뜨거운 것은 언젠가는 식는다. 나의 온도와 타인의 온도는 때때로 그 차이가 커서, 둘이 섞였을 때 너무 쉽사리 식고야 만다.

차가워진 커피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잔을 헹궈 개수대에 넣으며 오늘은 따끈따끈한 밀푀유 나베Mille-feuille nabe를 해 먹어야지 생각한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간절해지는 날이다. 뜨거운 날에 더 뜨거운 것을 집어넣어, 가슴속이 평안해 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