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 동안, 세 권의 에세이를 읽었다.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 김민영>, <아무것도 안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 김신회>, <말하기를 말하기 - 김하나> 이렇게 세 권.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무심코 집어 들었고, 빨려 들 것처럼 읽어 내렸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자기 전에도 틈만 나면 그녀들의 이야기(모두 여성 작가인 것은 100% 우연이다)에 빠져들었다. 공감 가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멋진 글귀를 발견하면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장에 기록했다. 지금껏 에세이를 재미있다 생각해본 적 없었다. 독특할 것 없는, 남의 소소한 일상이 뭐가 그리 재밌을까 싶었다. 그저 소설보다 재미없고, 인문서보다 덜 유익한 어중간한 종류의 책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 재밌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스스로를 편식하지 않는 독자라 여겼다. 어떤 책이든 편견 없이 내용에만 집중하며 읽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서점에 가더라도 제목이나 표지에 혹하기보다는 누가 썼느냐를 먼저 살폈다. 한 번쯤 목차를 보고 훑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내 기준에서 검증되지 않은 책에는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책에도 명백한 등급이 있다 생각했다. 세계적 석학이 쓴 책, 스테디셀러, 유명한 학자나 소설가의 책은 그렇지 않은 책과 다르다 여겼다. 다 읽지 못하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책 목록이 줄어드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늘어만 갔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시인 장석주가 그랬던가. 읽지 않아도, 이해하지 못해도, 책만 가지고 있으면 마치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책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나를 곧 편협한 독서의 길로 이끌었다. 읽을 책 목록에는 소설, 경영, 경제, 인문서적의 지분이 압도적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유명한 사람의 저작이었다. 웹소설, 무협지, SF소설같이 흥미 위주의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 여겼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간혹 자기 계발서 같은 종류의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읽을 책 목록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올바른 독서란 이런 것이라 믿었다.
사실,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영역이다. 누군가 함부로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내게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두꺼운 베개 혹은 냄비받침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잘 알고 있지만, 어릴 적 나는 읽는 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만화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겼고, 어렵고 전문적인 책을 읽는 사람을 한 단계 높이 평가했다.
에세이는 전자에 가까웠다. 에세이를 읽는 행위는 성장을 위한 책 읽기와는 멀다 생각했다. 어릴 적에는 공부는 어떻게 하고 20대와 30대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런 인생 지침서가 곧 에세이라 믿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종류의 책은 자기 계발서에 가까워 보인다). 스물이 넘어 읽은 에세이는 작가의 신세한탄 같았다. 소설이나 시처럼 다른 세계를 창조할 만큼 능력은 없고, 인문서적이나 경영서를 쓸 만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빌려 쓰는 일기 같았다. 이런 글을 엮어 책이랍시고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에세이에서 주로 다루는 ‘공감’이나 ‘위로’ 따위의 말은 나와 무관해 보였다. 그때까지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한치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벽에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서서히 깨달았다. 오르기 전에는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직접 오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조금씩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위대하게 되리라는 어릴 적 믿음은 희미해졌고, 꿈같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은 점점 커졌고, 내 마음에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갈라진 그 틈으로 불안, 고독, 우울 같은 감정이 나를 파고들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라 하지만, 곁에 두기엔 버거운 존재였다. 나는 그런 감정을 제어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짜증을 부리고,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거대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가뿐하게 바다를 누비는 고래처럼 우리 삶에도 부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잊고 가벼워질 순간이 있어야 한다. 가끔 그렇게 삶에 짓눌린 나를 떠받쳐 줄 무언가에 기대야 한다. (중략)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견딜 수 있는 힘은 소중한 것들에서 나온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시간, 소중한 물건, 소중한 가치 등이 부력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가벼워지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
-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중 -
힘을 뺄 필요가 있었다. 삶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정답은 없겠지만, 내 생각에 지친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꿈이나 이상이 아니었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 내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사실 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라디오를 켰는데 우연히 흘러나오는 좋은 노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요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 이른 아침 발견한 식물의 새싹 같은 것 말이다.
직장인의 삶은 특별할 것 없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비슷한 시간에 일하고 비슷한 밥을 먹으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다. 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다. 하지만, 매일이 비슷하더라도 사소하게나마 조금씩은 다르다. 라디오에선 매일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고 다른 사람의 사연을 들려준다. 어떤 날에는, 지난주까지 하지 못했던 요가 동작에 성공한다. 이른 아침 꽃이 펴 있기도 하고, 기다렸던 방울토마토가 열리기도 한다(진짜 열렸다!!). 뻔하고 반복돼서 재미없다 생각한다면 인생은 말 그대로 지루해진다. 반면에, 사소한 것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시선을 가진다면, 아마 매일이 새로운 날일 것이다.
에세이가 바로 그렇다. 작지만 소중한 것에 집중한다. 사소함을 다르게 바라보고 의미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술 한잔 하며 편안하고 재미있는 친구와 오랜 시간 수다 떠는 것 같다. 이상한 상사를 욕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제 읽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말해주기도 하고, 여자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근심은 사라지고 개운함이 감돈다. 나는 대체 왜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끙끙거렸나 싶다.
아, 이래서 에세이가 재밌는 거였어.
쓰면서도 읽으면서도 작가와 독자가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기보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 그것 때문에 쓰면서 외롭지 않고 읽으면서 정이 든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마치 작가가 아는 사람 같고 친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아무것도 안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중 -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