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친절의 힘
33일간의 도보여행 막바지.
‘아, 이제 6일 남았다’
그때 나는, 전라남도 장성을 지나 담양을 향하는 길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평일 낮의 도로는 한산했다. 이따금씩 한 차례, 차가 지나갈 뿐. 엔진 소리보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서늘한 가을 공기와 한산한 도로는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래 걸으니 몸도 제법 적응한 모양이었다. 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 지겨운 여행이 어서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참 오래 걸었다. 하루에 평균 5km씩 걷는다면, 200일 넘게 걸어야 할 양을 단 30일 만에 걸어내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걸었다. 이제는 걷고 싶어 걷는지, 도착하려고 걷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실 어느 것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도착할 때까지 다리가 버텨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하. 이런 게 여행인가 싶었다. 대화할 사람 하나 없이, 오로지 걷기만 할 뿐인 이 행위에 나는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극단적 경험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를 만드리라 믿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럼에도 걸었다.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걷기의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시작한 일을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잡생각을 하며 멍하니 걷고 있는데, 마침 은색 SUV 한 대가 내 옆을 지나가다 멈춰 섰다.
‘뭐지? 태워주려 그러나?’
여행 중 몇 번 경험이 있었기에 태워주려는 사람인가 싶었다. 마음속으로 거절하려는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리는 게 보였다. 3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어떤 남자분이었다.
‘왜 내렸지? 아는 사람은 아닌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머리를 굴려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웃는 건지 안쓰러운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힘내세요!”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사과 1개와 고구마 1개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한참을 멍하니 멈춰 있었다.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멀어져 가는 차와 손에 쥐어준 사과와 고구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일종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차를 세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린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꺼이 차를 세우고 내게 호의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그 지겨운 도로를 따라 걸으며 몇 번의 낯선 친절을 경험했다. 멀리서 뛰어와 밥 먹고 가라던 어떤 아저씨, 차 하나 다니지 않는 시골길에서 선뜻 태워주겠다며 문을 열어준 고마운 분, 길을 물었더니 알려주지 않고 아예 데려다 주신 어머님, 아들 생각에 기꺼이 밥 값을 내주셨던 등산객 부부, 그리고 지금의 사과 1개와 고구마 1개를 건네준 분까지. 알지도 못하는 낯선 이에게 선뜻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그 고마운 사람들이 고구마 껍질을 까는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들은 왜 내게 친절을 베풀었을까? 이름도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왜 선뜻 말을 붙이고 음식을 대접했을까? 나는 그들에게 낯선 타인이었다. 모르고 지나쳐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 없었다. 오히려 괜한 친절 때문에 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기를 냈다. 그리고 기꺼이 지나가던 한 사람을 위해 친절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친절이 공감에서 비롯된다 믿는다. 밥을 사준 등산객 부부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던 어머님도, 내 손에 사과와 고구마를 쥐어줬던 그분도, 모두 자신들의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생각한다. 어쩌면 내 상황이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굶어보았거나, 길을 잃어 보았거나, 걷지 못할 정도로 지쳤던 과거가 떠올랐던 게 아닐까? 그래서 멈춰서 선뜻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었던 게 아니었을까?
만약 언젠가 배낭을 메고 혼자 걸어가는 청년을 마주한다면, 나는 기꺼이 멈춰 설 것 같다. 잠깐의 망설임 없이 멈춘 다음, 차에 있는 뭐라도 꺼내 응원의 말과 함께 선물할 것이다. 친절이란, 순간의 아주 작은 용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삶의 벼랑 끝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동아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받았던 그 값진 호의가 어떤 청년에게 전달되면, 그 친절은 다시 다른 이에게로 전달될 것이다. 이런 낯선 친절의 릴레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불신으로 가득 찬 우리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 믿어본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김영하 <여행의 기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