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땅끝에 서서

끝, 시작

by 보노

2007년 10월 19일 이른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길을 나섰다. 그 날은 33일 간 도보여행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시작할 때나 끝날 때가 똑같은지. 겨울이 가까워진 늦가을의 공기는 제법 차가워져 있었다. 겉옷을 입지 않으면 춥다고 느낄 정도. 그러나, 걷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걷다 보면 땀이 나고, 체온은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마지막 일정은 해남 시내에서 출발해 땅끝마을에 도착하는 코스다. 대략 38km. 보통 걸음이면 7시간에서 8시간이 걸릴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나 같은 프로 워커(pro walker)에게는 6시간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땅끝에 도착했을 때,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맑은 날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바다를 보며 한낮의 오후와 그동안의 성취를 만끽하고 싶었다.



무작정 걸었다.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했다. 7시에 출발해서 1시쯤 도착했으니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땅끝은 작은 마을이었다. 국토순례자들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은 어촌이었다. ‘땅끝’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다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곳이었다.

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산 정상에는 땅끝 전망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왜 우리나라 전망대는 항상 저 모양인지. 그 촌스러움 형상이 상상 속 땅끝의 이미지를 무참히 깨버렸다. 땅끝에는 좀 더 상징적이고 시적인 조형물이 있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게다가 노란색 모노레일은 또 뭐람. 저런 걸 만들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머릿속이 문득 궁금해졌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최종 목적지인 땅끝탑으로 향했다. 땅끝탑은 마을에서 계단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야 한다. 대체 여기 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 뾰족한 형태의 탑이 보였다. 음, 저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던가.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대단한 뭐라도 있을 줄 알았다. 하물며 다도해의 멋들어진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흠.. 딱히 내 마음이 움직일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날이 흐린탓이었을까. 그저 평범한 섬 몇 개가 눈에 들어올 뿐. 미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바다와 탑을 향해 셔터를 몇 번 누르고선 매서운 바람을 피해 급히 마을을 향해 돌아섰다.



하루 묶으며 마지막의 여운을 맘껏 즐기고 싶었지만, 실망스러운 땅끝의 모습은 나를 버스터미널로 떠밀었다. 아쉽지도,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잠시도 여기 오래 머무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가장 빠른 해남행 티켓을 끊고선 지체 없이 땅끝을 떠나 버렸다.


나는 왜 땅끝을 최종 목적지로 정했을까? 남들이 정해놓은 공식(국토 여행의 출발/종착점)에 편승했던 걸까? 여기에 긴 여정의 끝에 어울릴만한 무언가 있으리라 믿었을까? 직접 눈으로 본 땅끝은 ‘끝’이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평범한 어촌이자 관광지였고, 생업에 종사하는 어부들의 터전이었다. 땅끝에 섰지만,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땅이 있었다. 끝이었지만 시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이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었던 것 같다. 도전이라 믿었고, 그 끝에는 지금의 나와 다른 한 단계 성장한 내가 서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오랜 시간 걸어오는 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빨리 끝내고 싶다’였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뒹굴거리며 늘어지게 자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리는 흔히 시작과 끝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다. 20대의 끝, 2020년의 마지막 날, 역사가 시작된 장소, 땅의 끝처럼, 처음과 마지막을 특별하게 여긴다. 새해가 되면, 1년의 계획을 세운다.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깊은 새벽 그 먼 거리를 달려간다. 허나, 우리가 시작과 끝이라 명명한 것은 사실 연속으로 이어진 시간과 장소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29살의 마지막 날과 30살의 첫날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2020년의 마지막이라는 것은 인간이 발명한 달력의 계산 값의 하나일 뿐이다. 탄생이라는 시작에서 출발해 죽음이라는 명확한 종착지를 향해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시작과 끝은 없다. 오로지 과정만 있을 뿐.


땅끝에 특별한 무언가 있을 거라 믿었던 젊은 날의 나는, 그 특별하지 않은 장소에서 걸었던 모든 순간이 특별했음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33일간 수 없이 내디뎠던 발걸음이, 사실 하나의 특별한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떼었다 붙였던 모든 발걸음이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소중한 순간은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을 안타까워하거나, 미래만 바라보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특별한 순간이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하루를 어떻게 버틸까 고민하기는 삶을 살기보다는,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