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책이 들려줄 가장 새로운 이야기

서랍 밑, 나의 첫 번째 재능

by 청은


그 책은 본디, 날 때부터 내 재능 서랍 속 그 자리에 주욱 있었다. 가장자리에 밀려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백과사전처럼 묵직하게 놓여있던 한 권의 재능이었다.


어릴 적 나는 표지가 화려한 외국서적과 비현실적인 동화책에만 매료되어 있었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 책엔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나는 내키는 대로 책을 사들여 훑어보기를 서슴지 않던 욕심쟁이였고, 또 끝까지는 읽어내리지 못하는 얄팍한 인내심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수년간 몇 권의 책들을 펼쳤다 덮어두기를 반복하던 나는 마침내 추상적인 패턴과 색색의 그러데이션이 덧입혀진 책을 펼쳐 들고서 진득하게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화려한 책의 이름은 '디자인'이었다.

그 이야기엔 픽셀을 다듬으며 얻어지는 성취가 있었고수많은 레이어를 쌓아 올리며 배우는 탐구 거리가 있었으며, 지쳐도 계속 마우스를 붙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장장 1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모니터 앞에서 보낸 수많은 밤들이 두께와 색상을 달리하며 서랍 한 줄을 빼곡히 차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나는 때때로 지루함에 몸서리치다 종이 한 면을 잘라내어 비행기를 접어보고 싶기도 했고, 때때로 극에 달한 스트레스에 못 이겨 죄 없는 종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기도 했으며, 종국엔 갈기갈기 찢어내 땔감으로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바래져 가는 책을 붙들고서야 깨달았다. 그 모든 충동들조차 결국은 이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었던 욕심의 일면이었음을.


바스락거리는 촉감도 까슬거리는 질감도 쿰쿰한 냄새도 모두 휘발되어 버린 지금. 나는 이제 이 책을 덮어줄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내 청춘의 한 칸을 변화무쌍하게 차지한 재능에게, 너의 이야기는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해주어야 할 때가 말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젊음과 열정에 동행해 준 고마운 재능에게 인사를 한 뒤 빗장을 닫았다.

나는 서랍 가장 아래쪽 귀퉁이 틀어박힌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한 손으로 들기엔 버거울 만큼 무겁고 두꺼운 고서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서, 가장 처음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언젠가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어 졸아버릴지도,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복잡다단한 활자의 세계로 뛰어들어보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다음 한 칸엔 또 다른 서적들이 하나 둘 자리할 것이다.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사랑을 노래하고, 종말을 선고하고, 희망을 향해 소리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