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실험으로 끝나는 연애에 대하여
내 연애는 항상 과학 실험의 실패 기록 같다.
나는 마음의 온도가 가열될 때까지
숱하게 많은 땔감을 들여야 하는 사람이라,
누군가를 만나서 반응하고,
탐구하고, 결합하는 동안에
에너지와 시간이 아주 넉넉하게 필요하다.
나는 뚝배기에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인데 반해,
상대는 금세 달아오르는
양은 냄비 속 메탄올 같아서.
그 맞지 않는 온도 차가 항상 나를 당황케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겨우 온도를 맞추게 된 두 번의 연애마저도
상대의 열 손실로 종료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연애라는 실험에서
적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여태껏 상대는
저 혼자 끓는점에 순식간에 도달해 놓곤,
사랑에 빠졌다며 비커 속 기포처럼 부풀었다.
그러다 예열을 마친 내 심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즈음엔,
이미 상대는 서늘한 기체가 되어
내 곁에서 증발해 버리고 만다.
[ 첫 번째 실험 상대 ]
지인의 주선으로 만난 소개팅 상대가
두 번째 만남부터 고백을 해올 줄이야.
그 남자는 다 녹아내려
끈적거리는 사탕수수처럼
맹렬할 정도로 뜨겁고
과포화된 다정함을 보였다.
호기심에 살짝 닿을라치면,
파리지옥처럼 입구를 쩍 벌려
나를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알코올램프에 연료를 들이부은 것처럼
적극적이었던 그 남자는,
첫 만남부터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심은 채였다.
나는 상대가 열렬히 흘려보내던
미끌거리는 문자에
이리저리 비틀거리다 점점 어지럼이 일었다.
남자는 맹목적일 만큼 당겼다.
나는 말끝마다 자기 자신을 오빠라 칭하고,
덥석 손을 잡아오던
그의 과도한 인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거리를 좁혀올수록 밀려나는
같은 극의 자석처럼.
속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거부감을
참지 못하고,
사정거리 바깥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 두 번째 실험 상대 ]
상대는 정말 잘 생겼었다.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소개팅 어플에서 만난 남자는,
세련된 차림새와 젠틀한 매너,
부드러운 말투로
미적지근한 내 심장마저도
살랑살랑 점화시켰다.
우린 두세 달 남짓 동안
서로 미온의 열의만을 보이며
신중하게 탐색했다.
불도저처럼 들이밀지도,
기름 섞인 말로 회유하려 들지도 않던
남자의 온도가
내겐 꽤 알맞게 다가왔다.
폭발적으로 발화되진 않지만,
적당히 안정감을 주는 온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연애를 기대하던 나는,
별안간 돌발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나 사실 너보다 10살 더 많아’
어플에서 서른 후반이라는
원래 나이를 기재하면
다들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가짜 나이를 쓰게 됐다며,
남자는 멋쩍게 사과했다.
열 살 차라는 변수는
20대의 내게 거대한 질량으로 다가왔다.
오차 범위를 벗어난 고백에
원망이 임계점을 넘어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에 지펴지던 불씨는
그날부로 파스스 꺼져버리고 말았다.
[ 세 번째 실험 상대 ]
다음 상대는 첫 만남부터 입술 박치기를 한
고위험군의 남자다.
카페에 들어서는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돌연 박수를 치던 기억에,
아직도 기막힘의 실소가 나온다.
그는 내가 자신의 이상형과 부합하다는 둥
신체 부위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둥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말을 살살 돌려하며
혼을 쏙 빼놓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유려하게 끌고 가던
대화의 흐름에
기어코 정신을 잠깐 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사귀자는 기하급수적인 고백에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겠지.
만난 지 세 시간 만에 이루어진
초고속 연애인 셈이다.
나는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일단 집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기어코 데려다주겠다며
집 앞까지 따라오는 남자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드디어
빌라 입구의 경계선을 넘으려던 순간,
그만 입술을 도둑맞고 말았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방호벽처럼 두고,
좀 전의 기습을 곱씹던 나는
이내 혼돈에 휩싸였다.
반복적으로 입술에 남은 미지근한 온도와
괴이했던 하루치의 대화를 되새겨 보면
결론은 오로지 하나로만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세 시간짜리 발화는
급속으로 냉각되었다.
훗날의 나는, 이 한 시간짜리의 연애를
연애 횟수에 포함시켜야 할지를 두고
난감한 고민에 빠지기도.
[ 네 번째 실험 상대 ]
네 번째 상대는 내가 처음으로
연구실 출입을 허락해 준 남자다.
지쳐가던 실험의 끝에서
적극적으로 속도를 내어 다가왔지만,
그게 이상하리만치 싫지 않았던 상대.
나는 그 남자와 저녁을 먹던 순간,
돌연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이 남자와는 연애를 하겠구나’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붙어있으면서도
딱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적은
실험 역사상 최초였다.
우리는 정해진 궤적을 따라 흐르는 전류처럼
찌릿하게 타올랐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성우가 쏟아져
찬란한 빛줄기를 그렸다.
하얗게 불태워진 별들이 불꽃놀이 속 폭죽이 되어
멈춰있던 심장을 세차게 터트렸다.
그러나 우습게도,
운명이라 생각했던 사랑은
고작 1년짜리 궤도였다.
내내 요란하게 타오르던 밤의 원자는,
희미해진 폭약의 그을음만 남기고
밤하늘에 삼켜졌다.
상대는 내 마음이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는지 따위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느 속도에 머물고 있는지 같은 건
배려해주지 않았다.
그는 제 마음을 정함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궤도를 이탈했다.
나는 홀로 남아 관성처럼 자리를 맴돌았다.
그 잔인한 순환의 고리에 묶인 채
방향을 잃고 헤맸다.
전력을 다했던 내 마음은,
멈춰진 뒤에도 따끔거리는 마찰을 남겼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저릿했다.
[ 다섯 번째 실험 상대 ]
네 번째 실험의 여파로
실험실의 공기는 오랫동안 침체되었다.
그 무료함을 깨 주는 상대가 나타난 건
실로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이전 실험이 남긴 피로감으로
의지를 잃었다.
보다 못한 동료는 닫힌 실험실 문을
억지로 열고 상대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흰 가운조차 걸치지 않은 채
상대를 만났다.
30대 즈음에 만나는 상대는
확실히 20대 한창때의 열화와는 달랐다.
분출 직전의 활화산처럼
뜨거운 증기를 내뿜기보다는,
잔불을 머금은 심지처럼
그저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실험은 적당히 데워지다,
잔잔한 기포를 띄우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새로운 연애가 성사되었다.
선선한 속도와
편안한 에너지가 평형상태를 이뤘기에,
이번에는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오래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쯤 되면 성공할 법도 하건만.
실험은 어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상대가 던지고 가버린
시간을 갖자는 통보를
망연하게 받아 들고, 일주일을 보냈다.
내내 시침과 분침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착상이 일었다.
그 멈춘 시간 동안
관계에 산재해 있을 법한 문제를 되짚어 봤지만,
그저 마음이 식은 거라는 명료한 결과만 나왔다.
상대는 마지막 헤어짐을 고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키는 여유 따윈 없이,
내가 건넨 물건만 받아 들고 사라졌다.
자리엔 누군가 머물다간 온기조차 남지 않았다.
관계의 종결에
변심만큼 뚜렷한 원인이 있을까.
나는 헛헛한 마음과 함께
다 식은 커피만 들이켰다.
다행인 점은 애당초 상대와
비등하게 타올랐기에,
나도 그리 오래지 않아 식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덜 사랑한 만큼 덜 아프다는 당연한 명제는
어쩌면 신의 배려일지도.
다섯 번의 실험을 끝으로
나는 텅 빈 실험실에 혼자 남았다.
갈 곳을 잃고 보글거리는 비커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숱한 실패를 낳은 결과는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고,
나는 서늘하게 식은 실험실을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누군가를 들일 용기도 내지 못한다.
단단히 내려진 셔터를
스스로의 힘으로 열고 나가기엔,
이젠 이 건조한 온도감에
길들여져 버렸을지도.
내 실험실을 은근한 불로
오래도록 데워줄 사람이 필요하건만,
영 존재를 알 수 없는 블랙홀처럼 느껴진다.
이놈의 비열한,
아니 이 비열의 차이 때문에
난 여전히 연애가 어렵다.
[ 히든 트랙: 마지막 실험 상대 ]
지극히 비이성적이고도
비과학적인 해석임에도 믿고 싶을 만큼,
나는 사주상 앞으로의 이성운이 좋다.
그러니 이 실험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미래를 위한 예행 보고서가 되겠다.
상대는 공기 중으로 기체가 퍼지듯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사랑인지, 사랑보다는 먼 관계인지,
그렇다면 우정인지, 우정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지.
온도를 알 수 없이
그저 잔잔하게만 움직이는 용액에,
비커엔 잔 파동이 일었다.
연락을 해오는 빈도도 미약하다.
안부 인사처럼 가끔씩만 다녀가는 연락이
어쩐지 신경 쓰인다.
밥 먹자는 말조차 적극적으로 오가지 않지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수다스럽게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다.
애써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호흡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온도를 감지할 수 있는 그런 관계.
어쩌면 이 남자가
나와 같은 비열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이상하게 자꾸만 상대가 궁금해진다.
실험실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