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전쟁터 위에 지어진 나의 전당

세상 모든 엄마라는 이름의 참전용사들에게

by 청은


짧게 구불거리는 파마머리,

구부정하게 굽힌 등허리에 단단히 아기띠를 맨

엄마의 스물일곱이 보인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빳빳이 세운 허리에

힙색을 둘러메고 주렁주렁 키링을 단

우리의 스물일곱이 보인다.


아기 등을 토닥이다 잠이 들고

화포 같은 울음소리에 아침을 맞는다.

보이지 않는 포탄이 터지는 거실 한복판에서

젖병을 병기처럼 움켜쥔 대장부의 모습이 보인다.


텅 빈 동공으로 릴스를 훑다 잠이 들고

일정하게 두드리는 북소리에 아침을 맞는다.

취업의 난 가운데에 저도 모르게 끌려 나온

어느 견습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빨리 어른이 되지 않으면

낙오병이 되는 엄마를

시간은 화살 같은 속도로 관통했다.


청춘과 젊음은 허공으로 갈라지다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엄마는 비장하게 선 채

밭은 숨을 내쉬며 날파람을 견딘다.


따가운 눈총이 빗발치는 진흙밭 중심에서

사방을 연신 곁눈질하며,

남들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 포복하며 나아간다.


이 길이 맞는지.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그 끝엔 무엇이 있는지.


두려움이 용납되지 않는 미지의 전장에선,

질문과 고민 따위는 사치가 된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는 건,

상부의 지시에 불복하는 단독행위나 다름없으니.


엄마의 스물일곱은

숨 막히는 규율과 틀에 박힌 위계로 점철된

아비규환의 전쟁터이다.


그들은 사회가 규정해 놓은 백병전에서

굳건히 살아 돌아온 용자이지만,

참전용사의 예우 같은 건 받지 못한다.


희생이 당연한 엄마이니까.


손에 박힌 굳은살과 습진의 흔적만이

그들이 바친 젊은 날의 노고를 기억할 뿐이다.


훈장은 가슴이 아닌 손바닥에 달린 채로

유일하게 반짝인다.


세월의 풍진에도 결코 바래지 않는 물성과

영원히 식지 않는 온기를 품고서.


엄마는 그 영광된 손에 계산기를 쥐고

끝도 없이 늘어나는 가계부와 씨름하다가도,

손바닥만 한 사진첩 한 장에 곧장 시름을 잊는다.


꼬마 공주와 어린 왕자의 천진한 얼굴을 보니

흉진 주름과 무두질된 허리 같은 건 금세 잊힌다.


그 용맹한 정예병은

자신의 청춘을 포로 삼아,

우리의 청춘을 지킨다.

자신의 세월을 내어줌으로써

우리의 세월을 돌려받는다.


이익 하나 남지 않는,

고약한 포로 교환이 따로 없지만


그들은 기꺼이 웃으며 내어주고 또 내어준다.


우리는 그 든든한 방공호 속에 숨어,

팔만대장경처럼 늘어진

가계부의 숫자 같은 건 무시한다.


이달의 생활비를 걱정하는 대신

수차례 시도해도 뽑히지 않는 인형에

신경질을 내고,


아기 이유식에 신경을 쏟는 대신

두바이 쫀득 쿠키를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우리의 스물일곱은

아직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아기의 우렁찬 포효도,

성난 발길질도 모른다.


세상이 두려운 어린 병사는

여전히 널따란 엄마의 등허리에 숨기 바쁘다.


같은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엄마와 우리의 시간은 천양지차로 흐른다.


엄마의 스물일곱과 우리의 스물일곱 사이엔

참호 같은 깊은 세월이 끼여 있다.


만년토록 낡지 않고

날마다 해가 드는 성벽 아래에서

우리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우리는 그들이 사수해 준 시간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즐거움을 누리고

배움을 탐구한다.


그 덕분에,

전장 같은 삶은 전당이 되어 고고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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