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개의 악장으로 멈춰버린, 나의 열여덟

이름 붙이지 못한 그 시절의 미완성 교향곡

by 청은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속을 잔잔히 울리는 교향곡 하나.


열여덟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새하얀 오선지에

오색의 음표들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녀는 취미로 다니게 된 학원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 온 기다란 미형의 생명체에

온 시선을 빼앗겼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속 마디마다 웅웅 거리며 공명이 일었다.

실로폰 채가 머리를 부딪히며 통통 소란하게 굴렀다.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부드러운 첼로를 닮았다.

소녀는 그 소리가 퍽 간지러워 귀를 살짝 긁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스물다섯의 청년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동경인지 선망인지,

혹은 그 너머의 무언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말랑한 심장에 둔탁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건 그려져선 안 되는 악보라고.

연주하는 내내 종이가 얼룩덜룩해질 것이라고.

소녀의 직감이 무섭게 경고했다.


바야흐로, 비극적인 1악장의 시작이었다.


소녀는 매일 학원에서 그를 보았다.

웃을 때 눈가에 지어지는 얇은 보표선 같은 주름부터,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걸어오는 장난,

크고 널따란 어깨와 고르게 뻗은 손가락까지.

모든 게 소녀에겐 교향곡의 선율과도 같아 보였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와 연주자처럼

소녀의 눈은 온종일 그의 지휘봉만 쫓았다.


그는 소녀에게 유독 더 살가웠다.

사물함에 바나나 우유와 초코바를 넣어두기도 하고,

학생들을 데려다주는 차량 운행 시간엔

소녀를 항상 마지막에 내려주었으며,

운전하는 내내 말을 붙였다.

오늘도 수고했다며 매일같이 보내는 문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소녀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 기묘하고도 정체 모를 친절에,

소녀의 감정은 점점 크레셴도로 치달았다.


뚜렷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화성을 지닌 채 한 해가 지났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소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어른과 학생이라는 선이

관계를 명확히 가르고 있었지만,

소녀는 마냥 좋았다.

멈춰진 메트로놈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시간은 금방 흐르고,

연주자와 지휘자는 무대를 떠나지 않을 테니.


곧 스무 살이 될 거란 기대감이

소녀의 안에서 분수도 모른 채 부풀었다.


그러나

경쾌한 장조만으로 가득할 것 같던 악장에

불길한 단조가 들어선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불현듯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1악장은 이미 최종장에 들어섰음을.


소녀는 갑자기 학원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왜 전개가 그렇게 틀어져 버렸는지는

지금도 뚜렷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취미로 계속 남겨두기엔

학업이나 미래 같은 현실의 무게가

예고 없이 조성을 뒤흔든 탓이리라 짐작할 뿐.


소녀는 그날 이후 그를 보지 못했고,

학원 바깥에서는 그와 닿을 수가 없었다.

그저 씁쓸한 마음을 머금은 채

홀로 2악장을 열었다.


소녀는 종종

관객 하나, 조명 하나 없는 무대 위에

홀로 연주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기억은 고적한 녹턴의 악상처럼 떠올랐다.

마디가 통째로 생략된 악보엔

공허한 울림만이 남았다.


유난히 그 진폭이 거세어지는 날엔,

보표를 뚫고 나와 마음을 짓이겼다.

소녀는 꽤 오래도록

축축히 젖은 악보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수능을 치고,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는 동안 내내

집에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학원을 향해

습관처럼 시선이 뒤따랐다.


소녀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운명은 얄궂게도

우연을 가장한 만남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고,

3악장엔 첫 음조차 그려지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줄곧 서로 맞추어 왔다 믿었던 합주는,

어쩌면 소녀만의 독주였을지도 모른다고.


가끔 걸려오던 침묵에 잠긴 통화 소리도,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도

영원히 베일에 싸여있겠지만.


끝내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단 두 개의 악장으로 멈춰버린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열여덟의 악보는

물음표만 잔뜩 남긴 채,

그렇게 마음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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