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크리스마스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화재가 있었다. 그 당시 바로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최근 화재현장을 정리하는 봉사활동이 있었는데 병원 소속으로 참여할 기회가 생겼었다. 봉사활동을 제안한 사무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와 멀지 않은 곳에 그런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재 현장은 아파트 고층에 위치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찌푸리며 집중해서 보니 시커멓게 그을린 창문이 보였다. '저곳이 불 난 곳이구나' 생각하면서 집합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 봉사단체에서 오신 봉사자들이 도구와 보호구들을 챙겨서 나눠주고 있었다. 이번 봉사활동의 목표는 화재 현장의 짐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일반 가정집을 생각했을 때 이삿짐 옮기는 정도로 생각해서 하루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릴 짐 예상 무게가 30톤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라고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봉사가 시작되고 나서 치우는 소리에 하나둘씩 나온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불 난 집의 집주인은 이전부터 주변 주민들과 충돌이 많았었다고 했다. 어디서 갖고 오는지 모르는 온갖 짐들을 집 곳곳에 쌓아뒀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아랫집 방 안까지 퀴퀴한 냄새가 내려가 창문을 열 수도 없을 정도로 생활하는데 지장이 많았다고 했다. 시청에 민원을 넣어도 집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강제적으로 짐을 뺄 수 없어서 주민들이 화가 잔뜩 난 상황이었다. 첨예한 대립관계를 깨트린 것이 작년에 발생한 화재였다. 주민들은 이렇게 강제적으로나마 짐을 치울 수 있어서 살 만해 질 것이라며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봉사자들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본인들이 그동안 얼마나 피해를 입고 살았는지 하소연하시는 분들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화재가 난 집에는 연관성이 젼혀 없는 짐들이 잿더미가 되어 쌓여 있었다.
이 집주인의 생활 습관 때문에 처음 집 문을 열고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집에 어찌나 빽빽하게 짐을 쌓아두고 살았는지 현관부터 짐을 빼는 것이 고난이었다. 봉사자들은 많은데 정작 작업해야 하는 공간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어서 일이 뎌디게 진행되었다. 병원 소속인 우리는 1층에서 대기했다가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포대에 담긴 짐들을 옮겨 아파트 마당에 쌓아두는 작업을 했다. 지게차가 오면 해당 집의 창문을 열고 현관과 창문, 양방향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무슨 사정 때문인지 오늘은 지게차가 올 수 없다고 하여 엘리베이터로 일일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화재 현장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를 피하기 위해 방독면 같은 방호복을 입은 작업자들만 올라가서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현관이 뚫렸다는 현장 작업자들의 연락과 함께 작업인원이 추가로 투입이 되었을 때 부족한 도구를 전달하기 위해서 현장으로 올라간 김에 현장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1층에 쌓여있는 짐이 상당해서 어느 정도 처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현관 근처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위험하기 때문에 집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문 밖에서 보이는 현장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어둠 속에서 작업자들이 땀 흘리며 쓰레기를 포대에 담고 있었다. 불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짐 때문에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 집주인은 어떤 생활을 해왔던 것일까. 바쁜 현장에서 그런 현장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조차 죄송한 일인 것 같아 빠르게 내려와서 일을 도왔다.
중간에 시 의원 몇 분과 국회의원이 오긴 했지만 한 번 짐을 옮기더니(정확히 이야기하면 짐을 옮기는 사진을 찍고) 현장에서 사라졌다. 2시간 정도 봉사하는 걸 계획했다는데 정작 현장에서 일한 시간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엘리베이터 오고 가는 시간 포함 20분도 안되었던 것 같다. 나름 시 운영에 신경 쓴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오늘 모습으로 인해 평소 부정적인 이미지의 국회의원의 모습을 더 확실하게 심어준 것 같았다. 주변 봉사자들 사이에서 '역시나'하는 말이 나왔다. 정했던 봉사시간은 점심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어서 불만을 뒤로한 채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아파트 일부 벽면을 포대 3~4 단으로 둘러치고 나서야 오전 작업이 끝이 났다.
화재가 발생한 현장을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라고 표현한다. 화마가 할퀸 건 현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포함한다. 주변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평소 집 주인의 행실 때문에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그런 모습에 집 주인도 마음을 쉽게 열 수 없었을 것이고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었다. 화재는 한 순간에 가졌던 모든 것을 잃게 했지만 집 주인과 주변 사람들간의 상처는 더 깊게 패이게 했다. 어느샌가 몸에 밴 탄 내가 점심을 먹는 코 끝으로 넘어와 구경하던 주민들의 모습과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기억하게 했다.
최근에 읽었던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살아가는 고통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을 화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것 같다. 어찌되었던 살아볼려고 벌인 일인데 말이다. 어렵겠지만 상처가 난 부분에 새 살이 돋아 각자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그런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라고 봉사 활동의 의미를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