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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푸름 Mar 19. 2024

'만약'이라는 중독적인 '약'

대학교만 오면 드는 생각

 오랜만에 모교인 대학교에 방문했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운동장은 한창 진행 중인 축구 경기로 활기가 넘쳤다. 운동장을 바라보는 계단에는 많은 커플들이 앉아서 바람을 쐬면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운동장과 맞닿아 있는 호수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산책길을 따라 서 있는 조명이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젊음의 기운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늦은 밤에도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열심히 살아간다.


 학교 다닐 때 그 호수는 조명이 없고 수목이 우거져서 해가 지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 가까이 가는 게 부담되고 어려운 장소였다. 지금은 조명과 더불어 물결에 흔들리는 불빛 덕분인지 이전보다 배로 호수의 풍경이 밝아졌다. 몇 년 동안 다닌 학교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장소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늦은 시간에도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생도 있었고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친구와 어깨동무하면서 들뜬 분위기로 술집을 향하는 학생도 있었다. 나도 10년 전쯤에는 저랬는데. 그런데 벌써 '10년'이란 기간을 쓸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니!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어이없긴 하다. 아직 30대 젊은 나이인데 살아온 인생의 1/3이 지난 시점이라고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길어 보이긴 한다.


 졸업한 후에도 가끔씩 시간이 나면 대학교에 오곤 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만약 대학교 2학년 때 이런 선택을 했으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만약 대학교 때 이런 동아리를 들었으면 지금의 인간관계는 어떠했을까?'


 '만약'. 나는 이 '만약'이라는 단어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들곤 한다. 왜 유독 학교에 오면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나는지. 그렇게 후회가 많았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러고 보면 '만약'은 어떠한 약보다 중독성 있는 '마약' 같은 단어다. (이런, 글 쓰면서 생각하다 보니 의도치 않았지만 그럴듯한 언어유희가 생각났다.) '만약'으로 문장이 시작되면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 반대편 길 너머로 땅을 내려다보며 어디론가 급하게 걸어가는 학생에게 '만약'이라는 주문을 걸어 상상 속의 내 모습을 겹쳐본다.


 오늘은 동물해부학 실험실습 과목이 있었고, 시간을 두고 결과를 봐야 하는 실험이라서 평소보다 늦게 수업이 끝난 덕분에 친구랑 한 잔 할 시간이 줄어든 것 같아 투덜거리며 기숙사로 가는 내 모습...

 사람들이 많은 곳을 어색해하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평소에 흥미 있어하던 음악 동아리에 들어가 동아리 행사 때 버스킹 하듯이 보여줄 통기타 연습을 하는 내 모습...

 졸업하기 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방학 때 듣게 된 인턴 체험 프로그램에서 근무했던 회사 임원 눈에 들어 강력한 추천을 받고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취직하는 내 모습... 뭐 이런 식이다.


 한참 추억과 상상이 섞인 꿈같은 세계에 붕 떠 있다 보면 머릿속뿐만 아니라 발걸음도 멍해지는 것 같다. 그러면 꼭 파여있는 도로에 발이 채이거나 누군가가 친구를 부르는 건지 크게 외치는 소리에 놀라 정신이 들곤 한다. 그렇게 재밌는 꿈은 강제 종료되고 현실 속에서는 졸업생, 직장인인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사실 나는 '만약'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 길을 선택한 내 책임에서 회피할 수 없다.

두 번째,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세 번째, 지금의 상황보다 더 좋을 거라는 확신이 없는 미래에 재미를 얹어서 망상하는 것 같다.


 한 때 남들보다 더 좋은 미래를 꿈꾸고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하고 알아가는 것이 많을수록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약해지고 좌절감도 많이 들었다. 이럴 때 '만약 그때 이렇게 한다고 했다면?, 만약 그 조언을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쫓았다면?'라는 말로 상상력을 자극시켜 안 좋은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름의 생존 본능이었겠지만 눈앞의 어려움만 막기 급급했고 속으로 문드러져가는 걸 놓쳐버렸다.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자극적인 상상력의 부작용 때문인지 현실에서 무력감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위의 3가지 이유가 이때 내 마음 상태를 정리하다 보니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중심을 잘 잡고 내부적으로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일단 현실에서 해내야 할 것에 집중하자고.


 어느덧 그런 '만약'이라는 약을 슬그머니 꺼내든 걸 보니 전보다 내 마음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던 걸까. 신선한 꿈이 주는 두근거림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보다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활력소라고 생각하려 한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기에 좋든 싫든 과거라는 내 삶의 흔적이 생긴다. 그 흔적을 닦아내야 할 지저분한 것으로 보고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란 전시회 중 어떤 주제의 전시관에 걸려있는 하나의 작품처럼 관망하는 너그러운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은 단순해보이는 자신의 스타일에서 잠시 이탈해 파격적인 시도를 해본 작가의 번외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들이 뭐라하던지 그것도 작가의 작품이다. 우리의 작품. 오늘 밤,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새로운 작품 하나를 또 걸어본다. 내용이 꽤 재밌는 작품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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