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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이길 원했다 (1)

논픽션1.

by 신푸름

충전 중이던 핸드폰 화면이 밝아진다. 종수는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고 한숨을 쉰다.


'또 연락이 왔구나'


종수는 핸드폰을 들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이 많을 것 같지 않을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종수는 이 사람과 전화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직원들이 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며칠 전부터 판단했다. 나름 오래 일한 이 직장 속에서 터득한 직감이었다.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계장님... 전화통화 되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보다 더 낮아지고 울적했다. 종수는 약간 불안해졌다.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종수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 위한 질문을 묵직하게 던졌다.


"저... 선생님.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신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네, 제가 며칠간 잠도 못 자고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요. 사과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요."


처음보다 제법 힘이 실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분은 저번 주 퇴직한 현정이다. 마주칠 때마다 밝은 웃음으로 인사하고 가끔씩 가져온 간식도 나눠줬다. 다른 부서 사람이었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다. 약 8개월 전, 내가 다니는 병원에 입사해서 가장 고된 일을 맡고 있는 부서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다. 원래도 마른 체격인데 여름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내부 온도가 높은 탕전실에서 일하느라 체중이 5kg 이상 급격히 빠져서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주변사람들이 하도 물어대서 민망했다고 했다. 그래도 현정은 종수가 볼 때마다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웃음을 유지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런 현정이 퇴직을 결심하게 된 건 어느 한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부정적인 소문들, 하나의 행동만 보고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일방적으로 싫은 티 내는 사람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나름대로 몸 바쳐 열심히 일한 부서의 동료들이 병원장까지 찾아가 부서의 어려운 상황을 공유하고 도와달라고 한 현정을 옹호하지 않고 일개 직원이 병원장을 찾아간 건 '월권'이라며 내치려고 했던 모습 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상황들을 맞이하면서 긍정적이던 마음이 차츰 식어갔던 것이다.


종수는 지금은 다른 부서지만 1년 전만 해도 현정이 일하던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3년 정도 일을 했기 때문에 부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서 이동 전에는 부서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면서 누가 휴가 가면 그 사람 일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종수는 부서 내 돌아가는 모든 일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총무과로 발령이 나면서 옮기긴 했지만 워낙에 힘든 곳임을 알기에 종수 자신이 나간 뒤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왔다. 자신이 있던 3년보다(사실 종수가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신규 입사자는 없었다.) 지난 1년 입·퇴사자가 많았다.


새로 오신 직원이 생기면 종수가 담당하는 구매 관련 업무를 핑계 삼아 그 부서와 잘 어울려서 일할 수 있을지 짧게 대화를 나눠보곤 했다. 대화를 나눴을 때는 다들 순수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제법 있어서 괜찮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근무한 지 한 달도 안돼서 다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고민과 생각이 많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신호였던 것 같다. 하지만 종수는 그 당시에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어쩌면, 만약, 종수가 한 마디라도 더 건네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들어줬다면? 썩어가는 마음속 고인 물을 빼낼 수로를 만들어줬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종수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


그러던 중에 현정 선생님은 꽤 오래 버티신 편이었다. 그래서 뒤에서 응원도 하고 잘 되길 바랐지만 그동안 나갔던 사람들이 토로했던 근무 환경이 바뀐 건 아니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더 악화되었기 때문에 퇴직을 결심한 현정 선생님을 막을 수 없었다.


"계장님, 저는 이 병원에서 남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정미 과장님이 제가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몇 번 잘못 부른 걸로 티 나게 싫어하셔도, 부서에서 나간 사람이 제가 일을 안 도와줘서 힘들어 나간 거라는 소문이 들려도, 심지어 행정 업무 하느라 사무실에서 주로 있으니까 왜 얼굴이 안 보이냐면서 업무를 제대로 하는 건지 욕하는 소리가 들려도, 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요. 제가 떠나는 마지막 날인데, 그분들이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저는 누구보다 이 부서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급여가 다른 곳보다 적어도, 힘들어도 버틴 거란 말이에요."


종수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터져 나올 때는 아니었다. 현정이 겪은 일은 종수가 겪은 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같은 부서사람들이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 직급이 높을 수록 자신의 말이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생각없이 뱉은 누군가의 말들이 소문이 되고 상처가 된 것. 그것이 분노와 원망의 시작임을 종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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