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간 휴가를 가지 않고 원기옥 모으듯이 참다가 5월 4일 휴가를 냈다. 연속으로 4일을 쉴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누구보다 빠르게 그 날짜를 선점했다. 여자친구와 나는 부산을 가기로 결정했다. 어디로 갈까 여러 지역을 이야기해보다가 '부산은 어때?'라는 말에 마음이 확 끌렸다. 순식간에 마음이 가는 대로 정했다. 다른 건 괜찮았는데 다만 날씨가 아쉬웠다. 휴가가 다가올수록 그 때의 부산 날씨를 계속 알아봤지만 휴가날 맞춰서 비가 온다는 안 좋은 소식은 변함이 없었다. 2주 전에는 비가 짧게 올 것처럼 예보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2일, 3일 늘어났다. 그래도 이왕 먼 곳으로 가는데 비가 오면 실내 쪽으로 다양하게 다녀보자며 여행을 준비해나갔다.
여행 출발일, 집에서 나와 여자친구 집쪽으로 가는데 가방에 달린 키링 줄이 끊어졌다. 작년 봄 석촌호수에 놀러 갔다가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산 키링이었다. 괜히 찝찝한 마음이 생기려 했지만 최근에 이직준비로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부산에서 더 예쁜 키링을 사기위해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텐데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생각회로가 잠시 좋은 쪽으로 회복이 된 것 같다.
부산 여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캐리어에 짐을 가득 챙기고 먼저 동대구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이번 여행은 원주에서 동대구로 버스를 타고 동대구에서 버스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부산 교통망이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해진 컨디션으로 여행하긴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그렇게 가기로 했다.
동대구까지 2시간 반, 동대구에서 부산까지 1시간 10분 정도 걸려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잡아놓은 숙소가 부산역 바로 다음 역인 중앙역 근처라서 빨리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중앙역에서 바깥으로 출구가 굉장히 긴 통로로 되어 있었다. 개찰구에서 나온 뒤에도 한참을 걸어가야 숙소 앞에 위치한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한양왕순대돼지국밥
생각보다 비좁은 숙소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숙소 근처 '한양왕순대돼지국밥'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음식 중 하나인 돼지국밥을 한 그릇씩 시켰는데 기대이상의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적당히 뽀얀 국물에 새우젓 한 숟갈이면 개인적으로 먹기에 간이 알맞게 되었다. 맨 처음에 소면이 말아져 있어서 설렁탕처럼 가볍게 국물 맛을 즐긴 뒤에 공깃밥을 말아 2차전을 시작하면 된다.
정구지 한 젓가락 올려 먹으면 최상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나는 평소 밥숟갈에 김치 같은 반찬을 일일이 올려 먹진 않고 밥 한 입, 반찬한 입 따로 먹는다. 여기 부추무침은 왠지 그렇게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은 정답이었다. 부추무침(부산에서는 정구지)을 올려 먹었더니 바로 입맛을 더욱 돋우어서 나도 모르게 다음 숟갈도 바쁘게 퍼올리고 있었다. 여자친구도 오랜만에 '전투적'으로 먹었다고 했다. 뚝배기의 까만 바닥이 보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반찬도 맛있었고 특히 양파가 맵지 않고 달아서 신기했다. 직원분들은 손님들이 손들고 뭔가 요청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직원분들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기분 좋은 부산의 첫 끼니로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다.
그리다부부
남포동 거리가 보이는 '그리다부부'
식후 방문한 '그리다부부' 카페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남포동 거리가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카페 안에 자리는 남포동 거리를 볼 수 있는 1.5층과 분위기 좋게 단체로 앉을 수 있는 지하층이 있었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커피맛이 계속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사실 커피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서 맛 구분하는 것에 무딘 편이었다. 산미가 나는 원두, 고소한 원두 등 원두 맛을 구분지어 소개하는 많은 카페들을 다녀봤지만 산미 외에는 맛 구분이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그리다부부' 카페에서 고른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는 원두 설명 그대로 초콜릿 말과 헤이즐넛 향이 솔직 담백하게 나서 좋았다. '내가 이런 커피다!'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멋진 녀석을 만난 느낌이랄까. 1.5층 제일 뒤쪽에는 벽에 기대어서 푹신한 쿠션과 함께 한껏 늘어질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모퉁이극장
소규모 영화관이 특징인 '모퉁이극장'
'그리다부부'에서 거리를 따라 좀 더 들어가면 '모퉁이극장'이 있다. 건물 바깥에 있는 특이한 모양의 구조물이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모퉁이극장은 소규모 영화관으로 풀네임은 '부산은행 아트시네마 모퉁이극장'이다. 부산은행에서 지역 문화예술 사업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1층은 부산은행이고 2층은 카페와 갤러리, 3층에 '금지옥엽'과 '모퉁이극장'이 있다. 금지옥엽에서는 포스터, 뱃지, 잡지, 도서 등 영화관련 굿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금지옥엽을 통과하면 영화관 같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에 위치한 모퉁이극장이 나오는데 최신 영화나 독립영화, 예술성 높은 옛날 영화들 등 여러 분야의 영화들을 다채롭게 상영하고 있었다. 일부 영화는 해당 시간 상영을 마치고 나면 굿즈를 준다고 했다. 우리가 이번에 본 영화는 흑백영화인 <자전거 도둑>으로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봤으나 결말이 굉장히 비참한 영화였다. 작중 주인공인 안토니오가 아들인 브루노를 부르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첫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긴 했지만 긴 이동으로 피곤했던 만큼 일찍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근처 깡통시장에서 돼지고기강정과 삼겹살 김밥을 포장해서 숙소 로비에서 먹었다. 날씨가 계속 흐리긴 했지만 이동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어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즐겁고 여유롭게 보낸 경험들이 날씨가 흐렸다는 사실이 생각나지 않게 한 것 같다. 숙소가 좁은 게 아쉽긴 했지만 나름대로 짧은 시간 안에 적응을 했다. 다음날도 흐린 날씨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불을 켜놓은 채로 둘 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