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의 둘째날, 쇼핑과 드로잉 카페
새벽에 창문을 심상치 않게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에 잠시 깼다.
'오늘도 실외에서 다니는 건 어렵겠는데'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 날씨 상황보고 어디 갈지 찾아보면 되겠지'하고 말이다.
이번 여행은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여행이라는 걸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차별로 몇 시쯤에 어디로 갈지 코스를 세세하게 짰었다. 하지만 일정대로 움직이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날씨에 따라 못 가기도 하고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다른 일정으로 바꿔야 할 때도 있었다. 계획적인 나한테 이런 변수들은 치명적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찾아놓은 장소들은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손수 빚은 수공예작품 같이 애착이 가는 곳들이다. 그런데 그곳들을 가질 못한다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다. 만약 그 변수들을 고려하여 또 다른 많은 옵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되고 여행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런 경험들을 몇 차례 겪고 점점 시간 단위로 움직이는 부담감을 마음에서 내려놓게 되었다. 부산 여행은 좀 더 무계획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닐 곳을 여러 군데 찾아놓긴 했지만 언제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컨디션, 날씨,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했다. 꼭 찾아놓은 곳만 가는 건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게 생겼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찾아놓은 곳에 없으면 즉석에서 바로 찾아 가보기로 했다. 정보를 충분히 찾을 시간이 없어서 괜찮은 곳인지 검증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해도 그건 그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계획적인 행동패턴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샌가 나는 잠이 깼고 뒤척거리다가 여자친구를 깨울까 봐 조용히 일어나서 비 내리는 부산 거리를 걷기로 했다. 우선은 숙소 근처에 있는 부산 타워가 있는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공원으로 가려면 호텔이 잔뜩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꽤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침이라서 부산타워도 화려한 불빛이 나오지 않고 조용했다. 밤에는 환한 불빛으로 감싸여서 주목하게 되지만 지금은 그냥 평범하고 기다란 시멘트 구조물이었다. 마치 화려한 무대를 내려온 쓸쓸한 배우처럼 보였다. 주변 산책로에는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다녔다. 큰 나무들이 길 따라 빽빽하게 서 있어서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이지만 공기가 깨끗했다. 공원에서 내려와 영도대교와 자갈치시장 사이에 있는 등대 마스코트 모형 근처에서 흐린 바다를 실컷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중간에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여유로운 산책을 방해한 것 말고는 괜찮은 아침 산책이었다.
오늘의 일정은 점심 가까이 되어서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놀 곳을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서면으로 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놓은 장소는 식사시간이 예상보다 빠르게 마감되어 갈 수 없었다. 다른 밥집이 어디 있나 찾다가 바로 앞에 덮밥집이 있어서 고민하지 않고 들어가서 처음 접해보는 호르몬동(대창덮밥) 하나와 메밀 세트 하나 시켜서 나눠먹었다. 가격이 조금 아쉬웠지만 새로운 느낌의 메뉴를 하나 알아간 걸로 만족했다.
점심 후에는 NC백화점에서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보기로 했다. 여자친구는 내가 편한 티셔츠나 슬랙스가 아닌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했다. 나도 코디를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늘 입던 옷 스타일에서 벗어나볼까 하던 참이었다. 옷 갈아입는 게 귀찮아 디자인만 보고 집는 옷을 바로 사는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긴 했다.
여러 가지 옷 스타일을 입어보니 의견차이가 생겼다. 나는 셔츠가 몸을 커 보이게 만드는 것 같다고 투덜댔지만 여자친구는 편한 옷 보다 깔끔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나한테 꼭 필요하며 셔츠가 잘 어울린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내가 계속 셔츠 구입을 피하려고 하자 장난스럽지만 아직까지 반박할 수 없는 무적의 말인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일이 잘 풀린다'로 분위기를 압도시켰다. 결국 다음에 옷을 사게 되면 여자친구가 권유한 스타일을 시도해 보기로 합의했다.
비가 계속 왔기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인상적인 활동으로 선택한 곳은 아크릴 물감으로 도안을 따라 색칠하는 '온나드로잉카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 밑그림까지는 괜찮은데 색칠만 하면 망쳤던 나에게 색칠하는 활동은 굉장한 부담감이 있었다. 그래도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여자친구와 함께 하기로 했다. 예약을 하고 가야 하지만 자리가 있으면 현장에서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백화점에서 나오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방문했다. 운 좋게 자리가 딱 2자리 비어있었다.
50여 개의 도안 중에서 제일 간단해 보이면서 감성적으로 보이는 도안을 선택했다. 앞치마와 팔토시를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직원분이 미리 주문한 음료와 도안이 인쇄된 캔버스를 갖다주셨다. 작은 이젤 위에 설명된 물감 색 조합을 참고하면서 원하는 색에 가깝게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칠해졌는데 가늘고 세밀한 부분을 칠하려고 하니 제일 가는 붓으로도 쉽게 채색이 되지 않아 캔버스를 이리저리 돌리며 편하게 칠할 수 있는 자세를 잡았다. 여기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에너지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번지는 것도 하나의 예술적 기법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면서 시원하게 칠하기로 했다. 선이 조금 삐뚤고 색이 고르게 펴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뭔가 완성시켰다는 것은 굉장한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여자친구는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보면서 계속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페를 나오는 길에 결제한 금액을 확인해 보니 음료값만 계산이 되어있고 그림을 그린 활동에 대한 비용이 빠져있었다. 아마 예약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참여해서 카페 사장님께서 깜빡 잊으신 것 같았다. 그냥 가게 되면 공짜로 그림을 그린게 되지만 양심적으로는 불편할 것 같아 제 값을 치르기로 했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시면서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면서 감사하다고 복 받을 거라고 하셨다. 말로만 들은 거지만 마음도 소화제 먹은 것처럼 편해지고 그린 그림도 가치가 더 있어지는 것 같아서 양심에 따라 행한 대가로 복을 받은 것 같았다. 더 좋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더 큰 복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서면에서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