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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푸름 Jun 13. 2023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나는...

만화를 그리던 어린 아이의 열정을 부러워만 할 수는 없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나는 만화에 푹 빠져있었다.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서 산 하얀 연습장은 낙서들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연필 끝에서 수 없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지우개의 심판을 받고 사라졌다. 나는 A4로 작은 만화책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A4를 8등분으로 나누고 가운데 부분을 칼집을 내서 이리저리 접으면 표지 포함 8페이지를 그릴 수 있는 작은 책이 완성된다.


 당시의 나는 모험물을 많이 그렸는데 집~학교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픈 마음을 그림에 반영했던 것 같다. 만화책를 만드는 방법은 이러했다. 처음에는 연필로 대략적인 틀을 잡고 장면에 맞게 칸을 나눴다. 등장인물들의 배치나 동작을 스케치로 살짝 그리고 마무리는 볼펜으로 했다. 밑그림을 지우개로 지워서 마무리하면 한 권의 책이 완성되어 있었다. 8페이지 밖에 안되는데도 나름 집중해서 그리다 보면 오후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진 만화책들은 보물 같았고 책상 한 모퉁이를 가득 차지한 만화들을 바라보면서 뿌듯함도 느꼈다.


플립북(Flip book), 출처 : 유튜브 'AK Ilen An Irish Maritime Project'


 책에 낙서를 이어서 움직이는 장면을 만드는 것처럼 연출한 애니메이션 기법을 '플립북'이라고 한다. 책 모퉁이에 간단한 캐릭터를 그리고 조금씩 움직임에 변화를 줘서 나중에 책을 넘기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인데 교과서는 최적의 플립북 재료였다. 얇은 책보다는 두꺼운 분량의 책이 좋았다. 화려하게 그리진 못 했지만 내가 만든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나무 인형이었던 피노키오가 생명을 얻고 살아 움직이자 자식처럼 보살펴 준 제페토 할아버지처럼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 깊어졌다. 점차 하나의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고 고정적으로 그려지는 조연 캐릭터들도 정해지면서 나름 스토리라인도 갖춰져 갔다. 창작의 신이 임한 것 마냥 만화 그리기에 혼연일체가 되었고 A4로 만든 만화책도 그 수가 급속도로 늘어갔다.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내 만화책이 있던 곳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굉장히 당황한 나는 어머니께 어떻게 일인지 여쭤봤고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린 만화들을 버리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할 최적의 환경을 만드시기 위해 공부에 집중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치우셨다. 처음에는 만화 그리기가 공부에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건드시지 않으셨지만 그 날 만화를 다 버리신 것은 손바닥이 연필가루로 시커멓게 번진 것이 공부가 아닌 만화 그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고 두신 강수셨다. 그때부터 나는 만화에 손대지 않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만화에 대한 열정이 시베리아 벌판 마냥 차갑게 식어버릴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열심히 만화를 그렸던 경험은 가끔씩 옛날 이야기를 하면 꼭 떠오르는 가슴아픈 추억이 되었다.




 요즘에는 캐릭터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 재산권)를 활용한 사업들이 활발하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부수입의 일환으로 폭발적으로 영역이 확대된 이모티콘 시장을 보면 정말 수많은 캐릭터들이 나와서 소비자들의 지갑을 유혹한다. 이모티콘으로 짭짤한 수입을 얻었다, 이렇게 하면 무조건 승인 난다 등의 내용으로 전자책, 강의도 시중에 많이 나와있다. 이모티콘 중에서도 정말 저퀄리티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유행과 감성의 흐름을 잘 타서 높은 순위에 있는 걸 보면 만화에 손을 놓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살짝 생기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는 만화책 한 권을 그려냈다는 뿌듯함만으로도 만화를 그릴 힘이 가득했다. 그런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그리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캐릭터가 되고 돈 버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한 걸 보니 나 또한 만화나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현실적으로 바뀌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인 생각이 나쁜 건 아니다. 우리 누구나 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목표니까 말이다.


 신문의 한 칼럼을 보고 어린 시절의 나를 회상해 봤다. 자기 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만화를 그렸던 집중력과 열정은 좋아하던 만화에 빠져있던 순수함이 원동력이었다. 지금 나는 눈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굉장히 노력 중이다. 최악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 긴장된 상태로 몸부림치느라 좋은 컨디션은 아니다. 당장 돈 벌고 일하는 문제에 순수함을 논하긴 어렵지만 만화를 그렸던 때처럼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거라면 이렇게 힘들기만 하진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 미래를 위해서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몸을 스트레칭으로 예열하고 뛰어야 부상이 적은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할 일을 하면서 마음을 예열시키기 위해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본다. 꾸준하게 하던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만났을 때 곧바로 뛰어들 수 있는 마음의 체력을 길러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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