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일기(2)
카메라를 통해 마주 본 상담사님 첫인상은 원래 알던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알던 동네 누나는 없지만 만약 친하게 지내던 누나가 있으면 이런 편한 느낌일까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가분들은 이런 분위기를 장착해서 내담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래서 그런지 대화도 생각보다 빨리 편하게 풀어나갔다. 속 마음을 열고 이야기 안 할까 봐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첫 시간은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탐색을 많이 하신다고 하셨다. 상담 전에 온라인 접수 면접지에 간단한 자기소개와 상담받고 싶은 부분들을 적었었고 문장완성검사지 50개 문항도 작성해서 보내드렸었다. 그래서 작성한 것을 상담사님이 미리 읽고 분석해서 상담 방향을 어느 정도 정해서 오셨는데 어떻게 접근해서 어떤 답을 찾아갈지는 대화를 하면서 찾아갈 거라고 하셨다.
상담의 주방향은 상담사님과 이야기해서 노력할 부분을 정했으면 실천해 보고 적용해 보는 것인데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효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상담의 중심이 나의 생각과 감정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정말 나만을 위한 특별한 상담을 받는 것 같았다.
바로 상담사님은 기본 정보에 대해서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셨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최대한 성실하게 했다. 상담받고 싶은 주제에 '평소 잘 참는 성격인데 이런 부분을 건강하게 해결하고 싶다'라고 답한 부분에 대해서 무엇을 그렇게 참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 : "제가 은근히 화가 많더라고요. 자잘한 일에도 화가 많이 나는데 그걸 겉으로 티를 안내요. 속으로 욕하고 말고요."
라고 이야기 하면서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 조직 내에서 겪었던 일들 중 최근에 화가 났던 일을 말씀드렸다. 상담사님은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고 답답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하셨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도 내 상황을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니 내 이야기가 폭포수 같이 쏟아져 나왔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이직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최근에 서류지원 결과에서 고배를 마신 것까지 이야기했다.
상담사님 : " OOO님이 자신감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위축된 것 같은데요. 서류 탈락으로도 그렇고 지금 있는 회사에서도 인정받거나 성취감을 느낄 요소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OOO님이 생각하기에 내 자신감은 언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주 결정적으로 내 자신감을 갉아먹는 건 무엇인 것 같으세요?"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언제더라. 이 부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최근 몇 년 동안 정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 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학교에서 보냈고 학습지와 책에 파묻혀서 살았다. 학창 시절 가장 심하게 해 본 일탈은 친구와 도서관 간다고 하고서 근처 PC방에 간 것이었다. 아무튼 과거의 삶 대부분은 공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중학교 때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시던 친구 아버지를 보면서 의사의 꿈을 키웠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의사에 관심 있어하니 잘 되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다. 필요한 교재나 책은 아낌없이 사주셨고 학원이나 독서실도 필요하면 바로 다니게 하셨다.
부모님의 지원에 힘입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나는 최상위권 성적을 받았지만 정작 목표로 잡았던 민사고, 과학고, 의대진학을 순차적으로 실패했다. 대학교도 의학전문대학원을 위해 생명과학과에 지원했고 의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했지만 의사라는 목표가 점점 누굴 위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의사가 되겠다고는 내가 먼저 말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기대가 버거웠고 나를 위한 목표가 아닌 부모님을 위한 목표로 바뀌면서 점점 더 지쳐갔다.
계속해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생에서 내 능력으로 이루어낸 것이 적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도 자신감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예전에 인생그래프를 그려본 적이 있었다. 나름 기복 없이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건과 감정을 함께 보니 인생에서 내가 힘들었다고 저점을 찍은 때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때였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은 나에게 모든 것을 지원해 준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상담사님 : "민사고를 못 갔고, 과학고를 못 갔고, 의대를 못 갔고... 결론적으로 보면 실패한 거다라고 표현하실 수는 있는데 이거를 상황만 놓고 보면요, 본인은 민사고를 꿈꿀 정도로 잘한 사람이었고 과학고도 아깝게 못 갈 만큼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었고 의대를 꿈꿀 만큼 스스로 공부를 잘했던 사람인거예요."
"본인의 실력이 그 정도를 꿈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민사고를 못 갔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거예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상담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짐과 동시에 그런 기분이 어색해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상담사님 : "어떻게 보면 짠한 마음도 드는 거예요. 이렇게 실력 있는 사람이 왜 그 시기마다 못했을까, 어떻게 헤쳐 왔을까를 생각하니 안타깝고 속상한 상황인 거예요."
"얘는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문장완성검사에서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내 능력으로 꾸준함과 성실함이라고 적었다. 상담가님은 그걸 나의 능력으로 적을 만큼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진짜 원망스러운 거라고, 내가 충분히 노력을 했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외는 나머지 외부 변수에 달려 있는 건데 이건 진짜 운이 엄청 없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거라고 하셨다.
상담사님 : "진짜 누구라도 너무 원망스러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원망도 못하니까 그것 자체가 화가 나고 원망스러울 수 있는데 오히려 부모님께 미안하고 부모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부모님한테 미안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 OOO이 충분히 억울해하고 화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 화들이 알아차림이 되고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에 대한 부분이 얘(필자 본인)가 이해가 돼야 해요."
나 : 저는 제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내가 노력을 안 한 거고, 힘든 걸 버티지 못한 거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렇게 제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왔어요. 그러면 더 힘들어졌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이야기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내가 믿는 사람들에게 속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들이 내 상황을 바꿔줄 수 없으니 결국 내가 바뀌어야 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상담사님이 해주신 말들로 새로운 생각의 회로를 만든 것 같았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게 포인트라기보다 나를 아프게 했던 채찍질을 멈추고 힘들어하는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제 그만 때리고 저기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봐달라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가 살짝 들어준 느낌이었다. 완벽하게 짐이 없어진 건 아니지만 가벼워진 느낌이 새롭게 느껴졌다.
다음시간에는 실패했던 일들을 두고 좀 더 깊게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전에는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나 자신을 욕하는 걸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번 상담시간을 통해서 실패의 결론이 다른 방법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나 자신을 사랑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들었다. 다음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생길까 기대하면서 다음 주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