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묻어두었던 후회의 감정

심리상담 일기(10)

by 신푸름

(이전 글 '[심리상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부족했다'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읽고 오시면 내용 흐름이 이해하시기 편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를 만들어라
- 김미경, <언니의 독설>에서


1. 오히려 후련했던 실패, 부족했던 건 내 마음


상담사님 : 굉장히 객관적으로 본인을 보셔야 되거든요. 공부했지만 떨어졌다, 부모님한테 죄송하다, 본인에게 너무 실망했다, 이런 거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냥 객관적으로 민사고 간 아이들하고 비교를 했을 때 내가 무엇이 부족했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 : 민사고를 가겠다는 마음이 크질 않았던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 성적이 우수했었는데 어머니께서 여름방학 때 민사고 캠프를 한번 갔다 오라고 하셨거든요. 캠프를 하고 왔는데도 '나 진짜 민사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그냥 '성적이 잘 나오면 민사고를 가는 거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간절히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니 민사고에 들어갈 턱이 없었다. 대안책으로 생각한 과학고로 진학 방향을 틀었으나 내신 3% 안에 들어야 하는 입학 기준에 소수점 0점 몇 차이를 충족시키지 못해 들어갈 수 없었다. 민사고나 과학고 모두 어머니께서 세워주신 목표였지비를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먼저 두 학교에 대해서 입시 정보나 입학하면 무엇을 배우는지 등 관련 정보를 제대로 알아보고 마음을 굳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나는 입시 전략이 부재했다. 무작정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가기만 했다. 그렇게 공부를 했지만 'OOO아, 네가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던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는 결과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아쉬워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 등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할 테지만 나는 실패라는 결과를 두고 생각보다 덤덤했다. 결과를 받아들인 후 잠깐의 짜증은 났지만 격한 감정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만한 중대한 기로였는데도 말이다. '왜 내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드디어 끝났다'라면서 무거운 짐을 이제야 내려놓았다는 후련함이 컸다.


2. 만나기 싫은 나의 모습, 이면에 감춰진 감정


상담사님은 이야기를 하고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물어보셨다.


지금의 부모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던지 응원해 주시며 내 인생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시지 않고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학창 시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시다. 하지만 나는 옛날의 부모님 기준에 나 자신을 평가 내리고 있다. '장남이니까. 집안의 기둥이니까.' 나중에 부모님이 나이가 드셨을 때 집안을 이끌 수 있는 든든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동생이 기둥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절 때 선물도 잔뜩 사 오고 평소에 연락도 나보다 배는 더 한다. 나도 안 해드리는 건 아니지만 동생과 비교되는 것 같아서 부족하고 못난 큰아들이 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한때는 부모님이 나에게 나 자신이 원치 않는 목표를 주신 거라 생각하면서 실패한 것에 대해서 온전히 내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이 많았었다. 그런 실패가 주는 패배감이 나를 집어삼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경험들이 '이때까지 이룬 게 없는 네가 할 수 있겠어?'라면서 발목을 붙잡기에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나와 이야기해보지 않고 당신들의 의지로 목표를 세운 부모님 탓도 있어'라면서 애써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커가면서 부모님께 드는 죄책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경제적으로 부족하고 어려웠던 어릴 적, 집안의 모든 신경과 집중이 나의 학업에 맞춰져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게, 공부할 책이 부족하지 않게, 과했으면 과했지 부족해서 공부를 못했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부모님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다. 집안의 경제적 상황을 잘 몰랐던 나도 부모님이 얼마나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시는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아닌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정한 목표가 아니었지만 그 목표가 없었으면 나는 꿈 없이 방황했을 수도 있고 더 어려운 길을 갔을 수도 있었다. 어긋남 없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준 것이 그런 목표들이라 생각한다.

만약 목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봤는데 나와 맞지 않으면 꿈을 위해 지원해주시는 부모님과 이야기해서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 이뤄가는 과정을 단순하고 쉽게만 생각했다.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부를 못한 건 아니지만 최상위라고 하기엔 부족한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맞이했다. 과거를 곱씹어보니 내가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는데 하질 않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상담사님 : 그 당시로 돌아가서 민사고, 과학고, 의대 준비하다가 다 실패하고 '그거 내가 정한 꿈이 아니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어'하고 있는 어린 자신을 만나면 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후회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나서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내 과거에 후회를 남기고 있었다.


나 : 한동안은 부모가 세운 목표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거니까 너무 나 자신을 책망하지 말자 하면서 실패를 마주 보지 않고 회피했었어요.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열심히 안 한 게 더 후회되는 것 같아요.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공부하면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꺼내고 싶지만 지금 제 안에는 그런 에너지가 바닥이라서 집중도 못하고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중요한 건 누가 정한 목표인지 상관없이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업, 목표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슴 아프게 후회로 남는 것이었다. 지금 집중이 되고 안되고, 결과가 좋고 안 좋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나 자신에게 '너는 최선을 다했니?'라고 물었을 때 적어도 후회의 눈물은 나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번 상담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었다. 후회의 눈물과 아픔. 이젠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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