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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푸름 Aug 19. 2023

순교자의 마음이 담긴 당진 버그내 순례길

충남 당진 당일치기 여행코스

우산을 뚫을 듯이 무섭게 쏟아지는 장맛비와 태풍이 드디어 지나갔다. 오랜만이라는 듯 구름 사이로 머쓱하게 얼굴을 내민 태양을 마주 보는 기분 좋은 날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휴가 전까지 같이 일하시던 선생님이 코로나에 걸려 그분의 업무를 대신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다. 광복절 다음 날부터 3일의 휴가를 붙여서 주말까지 쉬는 황금 휴가를 겨우 만들어놨기에 광복절만 바라보면서 버텼다.


휴가 전 마지막 출근을 하고 퇴근할 때까지 내가 없을 동안 일 때문에 연락하지 않도록 인수인계할 것과 약품 재고가 누락된 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오후 5시 반, 사무실 문을 잠그면서 바닥부터 솟아오르는 지하수로 말라버린 우물이 차오르듯 행복감으로 가득해짐을 느꼈다. 평소 휴가 내는 것에 눈치를 많이 봐야 했기에 해방감은 배로 넘쳤다.



휴가를 내긴 했지만 사실 마음 편하게 쉬질 못했다. 지원하고자 했던 공기업의 하반기 채용일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오늘만큼은 좀 쉬자!'라고 마음을 먹어도 하루종일 필기 준비와 자기소개서(자소서) 특강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채우려고 했다. 휴가 2일 차 저녁이 되었을 때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휴가를 낸 건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취미 활동으로 전국 둘레길을 다니고 있는데 예전에 둘레길에 한창 빠져서 하루종일 둘레길 정보만 찾던 중에 당일치기가 가능한 둘레길을 정리해 놨었다. 둘레길 완주 시간이 짧으면 3~4시간, 길면 6시간 정도 걸려서 마음만 먹으면 주말을 이용해서 하나씩 완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둘레길 코스가 그 지역의 시내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교통편이 좋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라 당일치기하기엔 시간이 애매해질 수 있어서 가지 못한 곳이 많다. 차 없는 뚜벅이로 여행을 다니는 나에겐 교통편은 여행 지역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둘레길을 버킷리스트처럼 남겨두고만 있었다.


이번 휴가 때 그중 한 군데를 꼭 가보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니 계획 세우는 건 술술 진행되었다. 여러 지역 중 충청남도 당진에 있는 '버그내 순례길'을 가기로 했다. 원주에서 가려면 서울을 거쳐서 돌아가야 하기에 이동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순례길 자체는 13.3km로 다른 둘레길에 비해 긴 편은 아니어서 빨리 완주하고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외버스 배차 간격과 순례길 완주 시간을 고려해서 대략적인 시간표를 짜고 다음날 버스표들을 바로 예매했다.


1. 원주고속버스터미널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서울남부버스터미널 (2개 역 이동) → 합덕버스터미널


버스예매시간에서 크게 영향을 끼친 건 서울남부버스터미널과 합덕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의 배차 시간이었다. 배차간격이 대략 2시간에 1회라서 한 번 놓치면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에 모든 일정을 여유롭게 계획했다. 오전 6시 15분에 원주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환승을 계속해서 4시간 후 합덕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배가 고플 것 같았는데 오랜만의 둘레길 완주를 기대해서인지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합덕은 당진시에서 읍단위 지역이라 주변 환경이 도심지같이 발달하진 않았다.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는 버스를 타고 가면 10분 걸리는 곳이었지만 버스가 많지 않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려 걸어가기로 했다. 이미 선크림을 충분히 발라 하얗게 된 얼굴에 선크림을 덧바른 나는 벌써부터 뜨거워지는 햇빛을 경계하면서 걱정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위에 워낙 약해서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2. 솔뫼성지 (10:30 도착)


합덕버스터미널에서 솔뫼성지 가는 길은 지도 그대로 쭉 뻗어진 길을 걸어가면 도착하기 때문에 길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오른쪽이 솔뫼성지 문화해설자의 집으로 버그내순례길 스탬프투어 책자를 받을 수 있다.

솔뫼성지에 들어서서 주차장을 지나가면 바닥에 '솔뫼성지 START'라고 표시된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방향을 따라가면 문화관해설사가 계시는 사무실이 나오는데 거기서 스탬프투어 책자를 받을 수 있었다. 버그내 순례길 하려고 원주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놀라셨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은 오랜만이라고 하셨다. 스탬프투어 책자를 받을 때 순례길 완주 기념품 지급을 위한 등록명부를 작성을 한다. 명부를 잠깐 살펴보니 제일 더운 8월이라서 그런지 순례길 자체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내가 오기 직전에 방문하신 분은 10일 전에 오셨다. 내가 생각해도 순례길 하려고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곳을 오는 게 정신 나간 게 아닌가 싶었지만 스탬프투어 책자를 받자마자 완주 의지로 불타올라서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해설사님은 출발하기 전 몇 가지 팁을 주셨다.

① 합덕은 교통편이 좋지 않아 버스로 다니기 어려운 곳이다.
② 두 번째 구간(합덕제)을 지나면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합덕 버스터미널이 있는 시내 쪽에서 필요한 것을 다 챙겨서 가야 한다.
③ 순례길은 총 10군데를 방문하여 스탬프를 찍는 것이지만 마지막 3개 구간은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거더리공소, 세거리공소, 하흑공소)

투철한 신앙심으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구간을 눈에 담고 감동을 느낄 목적이 아니라면 7구간까지 가도 완주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셨다. (버그내순례길 공식홈페이지에서도 7구간 이후 3개 구간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처음 조사할 때 7구간까지를 생각하고 시간을 정했기 때문에 계획상 문제 될 일은 없었다. 타임어택 형식으로 빠르게 완주하는 것이 목표라서 각 구간을 충분히 즐길 시간은 없었지만 첫 번째인 솔뫼성지만큼은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이고 순례길의 시작 구간이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들은 둘러보기로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솔뫼아레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상, 생가
천주교 복합 예술공간 '기억과 희망', 대성전 내부

'기억과 희망'의 대성전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 방식으로 그림들이 있었다. 보통 성당들이 햇빛을 이용해 웅장함과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서 성스러움을 강조하는데 이곳은 다른 성당의 제단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느낌이었다. 솔뫼성지로 걸어오느라 달궈진 몸을 잠시 식히고 돌아 나와 다음 구간으로 향했다. 순례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3. 합덕제 ~ 합덕성당 ~ 합덕제중수비 ~ 원시장,원시보 ~ 무명순교자의 묘 (11:10 ~ 12:13)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합덕제, 합덕성당, 원시장·원시보, 합덕제중수비

합덕제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 근처에 있었다. 합덕제는 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저수지였다. 지금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어 저수지로 사용했을 때 쓰인 제방만 남아있다. 주변에 연꽃이 숲처럼 빽빽하게 자란 곳이 있었는데 옛날 규모였다면 훨씬 어마어마했을 것 같았다. 여름에 걸맞은 새파란 잎들이 눈 가득 푸르름을 담아주고 있었다. 합덕제를 지나고 합덕성당부터는 순례길의 이정표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정확히 방향을 알려주면 좋은데 중요한 부분에서 그런 배려가 없어서 지도를 보면서 헤매면서 길을 찾았다. 간혹 이정표가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아서 이리저리 돌다가 한두 번 찾아내는 정도였다.


순례길이라서 그런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특히 '무명순교자의 묘'로 가는 길은 도보가 없고 차도로 가야 해서 위험했다.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지만 조심해야 하는 길이다. 이정표에 나온 무명순교자의 묘에 가면 작은 언덕 입구에 묘가 있어서 그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함정이다. 더 위로 올라가야 묘지와 스탬프 찍을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인증 스탬프함을 찾으려고 입구에서 헤매다가 풀속에 가려진 이정표를 겨우 발견해서 제대로 된 장소를 찾았다.


순례길 중간에 그늘도 쉴 곳도 없어서 빨리 완주를 하는 것이 더위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지막 코스인 '신리성지'를 갈 때는 그늘 하나 없는 유난히 곧게 뻗은 길을 가야했다. 덕분에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야 했다. 요즘 사람들이 왜 순례길을 안하는지 맨 처음 방문자 등록명부를 볼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4. 신리성지 (12:30 도착)

신리성지에 도착하고 건물 안에 들어가 한참 동안 물을 마셨다. 아침도 안 먹고 걸어 다니느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 본당에 들어가 오늘 다녔던 곳을 생각하면서 쉬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 뒤에야 버그내순례길의 마지막 장소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있던 곳으로 조선 천주교 교사,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했다고 한다. 조선의 카타콤이라고 불릴 정도로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곳이라 했다. 그런 굉장한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규모는 그에 비해 소박하긴 했다. 건물 곳곳 새겨진 선교사들의 행적들을 돌아본 뒤에 합덕 버스터미널로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어떤 둘레길은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 있게 코스가 짜인 경우도 있지만 버그내순례길은 한 방향으로 정해진 코스라 시작지점으로 돌아가려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신리 성지에는 버스가 하루에 2대만 온다고 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하나 쉬운 게 없는 코스였다.


원래는 완주를 하면 다시 솔뫼성지로 돌아가 스탬프 완주 인증을 받고 기념품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사실 순례길 시작 시점에서 해설사님이 완주하고 오면 시간상 사무실에 사람이 없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미리 완주 도장과 기념품(완주배지)을 주셨다. 그래서 순례길 시작 전 동기부여가 살짝 사라질 뻔했지만 멀리서 온 만큼 완주하고 가자고 생각했다. 둘레길 배지를 모으는 입장에서 배지를 미리 받아버렸으니 완주할 필요는 없었지만 고생해서 받아야 하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그걸 위해 이곳에 온 것이기도 하니까. 대략 2시간 30분 정도에 끝난 순례길이었다. 왕복시간에 비하면 너무 한 것 없이 온 거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어쨌든 굉장히 빠른 시간에 목표를 성취한 것이 마냥 좋았다. 둘레길 리스트에 한 줄이 그어짐과 동시에 다음 둘레길 목표도 슬슬 세워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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