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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ul 24. 2019

논산 훈련소 1

  훈련소 막사 앞에 도착하자 이제 막사 안으로 들어가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깨에 멘 더플백을 땅에 내려놓기 무섭게 수용연대에서 우리를 인솔해 온 상병 계급장을 단 기간병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뺑뺑이만 돌리는 것이었다. 뺑뺑이는 짧은 겨울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막사는 수용 연대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탄가루로 바닥은 지저분했고 실내는 낡고 우중충했다. 내 자리는 추운 문가 자리였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 상병은 ‘침상 3선에 정렬’을 소리쳤다. 갑자기 들린 외침 소리에 모두 눈만 멀뚱 거리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이 새끼들아’ 하며 앞에 있는 훈련병을 냅다 걷어찼다.

 한참을 모두의 혼을 빼놓던 그 상병이 내무반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나를 불러내 일방적으로 선임분대장이라고 소개했다. 훈련소에 가면 절대 향도는 맡지 말라는 말을 입대하기 전 수없이 들었다. 향도는 곧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선임분대장(향도)이라니! 내무반장은 덩치와 키가 엄청 큰 녀석들 네 명을 분대장으로 지명했다.

 내무반장은 군복 상의 오른쪽 가슴에 실로 소속과 이름을 새기고 더플백을 풀어 관물 정돈을 하라고 하면서 옷 사이에 종이를 집어넣어 관물을 두부 모처럼 각을 세우라고 했다.

 훈련소에서 2주쯤 지나자 석탄 가루가 날리던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막사를 떠나 새로 지은 막사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따뜻한 물과 스팀이 나오는 초현대식 막사라며 모두들 좋아라고 했다.

 우리 새 내무반은 신축막사 2층에 있었다. 내무반에 들어가려면 통일화를 1층에 있는 신발장에 벗어 넣고 들어가야 했는데 이것이 우리를 그렇게 힘들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내무반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각 방에 20명씩 생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바닥은 윤이 날 정도로 반짝거렸고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내무반은 따뜻하고 쾌적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세면장은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군대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다니 하며 모두들 좋아했지만 그 기쁨은 하루를 채 넘지 못했다.

 새 막사로 이사한 다음 날 아침에 난리가 났다. 아침 점호를 받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찾았지만 신발장에 있어야 할 통일화가 보이지 않는다며 허둥대는 훈련병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눈앞이 캄캄한 것도 잠시, 급히 내무반으로 뛰어 들어가 관물대에 갈무리해 둔 통일화를 꺼내 신고 연병장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통일화를 보충하는 길은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통일화를 잃어버리고 훔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통일화를 잃어버렸다고 툴툴거리던 녀석들이 아예 잃어버린 체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도둑이 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그렇게 잃어버리고 훔치기를 거듭했지만 나는 훔칠 배짱도 훔칠 시간도 없었다. 모두 잠든 시간 불침번을 설 때 신발장으로 가서 통일화를 슬쩍해 와야 하는 데 선임분대장은 불침번을 빼주었던 것이다. 경남 사투리를 아주 진하게 쓰는, 훔치는 데는 선수인 녀석이 있었다. 내가 통일화를 잃어버린 것을 안 녀석이 걱정 말라며 나가더니 대낮인데도 금방 통일화를 두 켤레나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예비로 한 켤레를 더 가지고 왔다고 했다. 씩 웃는 녀석이 그렇게 고맙고 이쁠 수가 없었다. 녀석은 통일화 크기까지 맞추어 훔치는 대담성을 보였다. 내무 사열 시간에 내무반 마루 밑에 감추어둔 통일화를 들켜 엉덩짝을 얼얼하게 맞고 숨겨둔 통일화를 압수당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통일화 훔치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 녀석은 수시로 내게 찾아와 통일화 다 가지고 있느냐고 확인을 하곤 했다. 때문에 통일화 잃어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훈련이 끝날 무렵 어느 날 아침 관물대 한 구석이 허전해 보였다. 뭐지 하고 꼼꼼히 살펴보는데 아 이럴 수가! 더플백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끙끙 앓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 자유시간에 소대원들에게 사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훔쳐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누가 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에둘러 말했다. 그게 통했던지 한 녀석이 한 밤중 자신이 불침번이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깨자마자 관물대부터 쳐다보니 아, 거기에 더플백이 각 지게 개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가지고 왔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녀석이 얼마나 고맙던지! 며칠이 지나도 더플백 소동이 없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훈련소를 떠나는 날 아침 더플백에 관물을 담고 있는데 옆 내무반에서 대성통곡 소리가 들렸다. 더플백이 없어진 녀석의 절망에 찬 울음이었다. 가슴이 덜컥했지만 눈으로 나를 찾으며 의미 있는 웃음을 웃는 녀석에게 눈웃음으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옆 소대 내무반장이 별로 화도 내지 않고 잃어버린 더플백을 채워주었다는 말을 듣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매주 한 번씩 실시되는 내무 사열 시간은 악몽 그 자체였다. 내무반 바닥과 식탁은 물론 물주전자와 컵 등 비품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놓아도 선임하사의 예리한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선임하사는 침 묻힌 손가락으로 창문틀이나 탁자 밑바닥 같은 곳을 쓱 문지르고는 씩 웃으며 선임분대장부터 찾았다. 선임하사는 결코 소리를 지르거나 악을 쓰지 않았다. 혼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지적만 할 따름이었다. 악을 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내무반장 몫이었고 그 대상은 언제나 선임분대장인 나였다. 그럴 때마다 옛 막사 생각이 절로 났다.

 저녁 점호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시빗거리는 언제든 어디든 있게 마련이었다. 주번 사관의 호루라기 소리와 내무반장의 침상 3선에 정렬 소리는 언제나 살 떨리는 소리였다. 정작 주번 사관의 점호는 전혀 살벌하지 않았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내무반의 냉기를 식히기도 했다. 그런다고 같이 미소를 짓거나 마음을 놓았다가는 매에 굶주린 내무반장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점호는 원래 이탈 인원이 없는지 아픈 사람이나 이상이 있는 사람은 없는지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 같았다. 훈련병 군기잡기나 내무반장 스트레스 해소, 또는 분풀이용 뭐 그런 거 말이다. 때로는 전혀 엉뚱한 목적을 은근히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내무반장이 잘못했다면 그건 잘못한 것이었다. 보초 일반 수칙이나 국민교육헌장 같은 외우기 쉽지 않은 것이나 관물 정돈, 병기 수입 상태, 청소상태, 복장 등 트집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내무반장이 주번 사관에게 점호 인원 보고를 할 때 번호를 제 때 제대로 외치지 못하는 멍청한 녀석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기합 거리에 굶주린 내무반장에게 이만한 트집거리는 없었다. 눈알 돌아가는 소리도 트집이 되었으니 말이다. 엎드려뻗치기는 기본이고 침상 바닥이나 철모에 머리를 박는 원산폭격, M1 소총의 가늠쇠를 이빨로 물고 서있거나 한 손으로 M1 소총을 들고 팔을 뻗치고 서 있게 하는 등 온갖 기합이 동원되었다. 기합보다 정작 무서운 건 분위기였다. 2단 옆차기를 날리거나 철모를 바닥에 내동댕이칠 때면 신출내기 훈련병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선임분대장인 나는 늘 내무반장의 분풀이용 제물이었다. 관물 정돈이라든가 복장상태 불량 등 소대원들의 정신 상태나 군기가 빠졌다는 말이 내무반장 입에서 나오는 날은 내 엉덩짝에 불이 났다. 내 엉덩짝은 거의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엉덩짝을 맞으며 비명을 지르거나 몸을 비트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텼고 그럴수록 내무반장의 몽둥이 쳐든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내무반장 너 깟 놈한테 지나 봐라 이를 악물고 버티면 소대원들의 긴장도는 높아갔다. ‘우리 땜에 선임분대장이 맨 날 두들겨 맞는데 우리가 정신 차려 잘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곤 했다.

 훈련장에 갈 때는 늘 줄을 맞추어 단독군장으로 행군을 하거나 구보로 움직여야 했다. 이동하거나 줄을 설 때 내 자리는 언제나 오른쪽 맨 앞이었다. 늘 기준을 잡아야 했고 다른 친구들보다 눈치가 빨라야 했다.

 입소하고 그리 오래지 않은 아침에 PRI교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행군을 하는 도중에 내무반장이 큰 소리로 군가를 한 곡 부르더니 한 소절씩 따라 부르라고 했다. 별 신경 쓰지 않고 한 소절씩 따라 부르기를 딱 한 번 했는데 내무반장은 바로 ‘행군 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휘날리는 태극기, 군가 시작.’ 하는 게 아닌가. 천재가 아니고선 한 번 따라 부르고 그것도 별 신경쓰지 않고 따라부른 군가를 누가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것 봐라. 모두 정신을 어따 두고... 모두 제 자리에 서.”

 “정신을 어따 두는 거야? 지금부터 오리걸음으로 간다. 총은 철모 위에 거꾸로 든다, 실시”

한참을 끙끙거리며 오리걸음으로 걷는데

 “한 번만 더 따라 부른다. 이번에도 못 부르면 죽었다고 복창해라 알았나?”

 한 번 더 따라 부른다고 군가가 되겠는가. 길 한가운데서 원산폭격에, 철모 위에 총을 거꾸로 들고 오리걸음에, 어딘지도 모르는 교장까지 그렇게 되지도 않게 군가를 부르며 가야 했다.

 교장에 도착하자마자 교육은 제쳐두고 뺑뺑이부터 돌리기 시작했다. 선착순에, 쪼그려 뛰기에, 푸시 업에, PT체조에, 원산폭격까지 기합이라는 기합은 다 동원되었다. 고꾸라지는 녀석에게는 몽둥이가 등짝을 사정없이 갈랐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쓰러지는 녀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내무반장님”

 “뭐야 이 새끼야”

 “기합은 저한테 주시는 거 아입니까? 기합은 제가 대표로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뭐야 이 새끼가”

 내무반장은 언제 끌렀는지 달려와 탄띠에 달린 수통으로 등짝을 후려쳤다.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 그대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프다는 느낌도, 숨을 수 조차 없었다. 한참을 꼼짝도 못 하고 고꾸라져 있자 내무반장도 겁이 났던지 더 이상 때리지는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잠시 후 아무 일 없었던 듯 PRI 교육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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