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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ul 26. 2019

논산 훈련소 2

 우리 중대 행정반에는 상병 한 명과 이병 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에게 그리 악독하게 지는 않았다. 어느 일요일 우리 내무반에 놀러온 상병이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너들 돼지 와 키우는지 아나?”

 “잡아먹을라꼬 키우지요.”

 “잘 아네, 그라만 군인은 뭐 할라꼬 키우는데?”

 “군인도 잡아먹을라꼬 키우는 깁니까?”

 “그렇지. 군인은 전쟁에 써먹을라꼬 키우는 기다. 너것들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돼지나 마찬가지다. 자존심 같은 거 다 잊아뿌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기 편한 기다 알겠나?”

 우리가 돼지와 같은 존재라고? 나라가 우리를 돼지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자존감이 한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주는 식사는 언제나 밥과 국, 김치뿐이었다. 국은 늘 된장국이었고 국에 들어가는 내용물만 조금 달리할 따름이었다. 훈련병들은 배식을 받아 여섯 명이서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는데 밥 먹는 속도가 느렸던 나는 아무리 밥을 빨리 먹으려고 해도 언제나 꼴찌였다. 때문에 오래 기다리는 친구들이 미안해 밥을 채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나야 할 때도 있었다. 훈련병들은 늘 배가 고팠고 먹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첫 휴가 가면 휴가비로 빵을 다 사 먹을 거라는 녀석에, ‘야, 그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잖아,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빵을 구워 먹는 게 훨씬 낫지’ 라는 녀석까지 있었다. 소시지를 배가 터지도록 사 먹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점심을 막 먹고 나서 PX 앞을 지나는데 PX 문이 열려있었고 그 안에는 훈련병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늘 문이 닫혀 있던 PX가 빵을 팔고 있다니! 얼른 들어가 크림이 채 1mm도 되지 않을 크림빵을 몇 개 샀다. 빵은 입에서 그대로 녹는 거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 자리에 동작 그만’ 찌렁찌렁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놈씩 밖으로 나온나’ 문밖에서 예의 그 상병이 PX 밖을 나오는 훈련병들의 따귀를 차례로 갈기고 있었다.

 “얼씨구 선임분대장 니 눔까지. 그리 배가 고프드나, 밥 금방 처묵고?”

 입 속에 빵을 가득 문채 뺨따귀를 맞아야 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때리지 않는다는데 빵 같지도 않은 빵을 먹다가 뺨따귀까지 맞다니 정말이지 돼지보다 나은 게 없었다.

 이틀에 한 번씩 화랑담배 한 갑씩 배급을 받았다. 필터가 없는 화랑담배는 필터 길이만큼 담배길이가 짧았지만 훈련병들은 그것도 반 정도만 피우고 꽁초를 남겼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훈련병들에게는 별 사탕 한 봉지씩을 나누어 주었다. 말이 한 봉지지 콩알보다 약간 큰 사탕 몇 개가 조그마한 비닐봉지 안에 든 것이 전부였다. 담배와 별 사탕은 선임분대장이 행정반에 가서 타 와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몇몇 선임분대장이 그 별 사탕을 반밖에 나눠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중대내에 돌기 시작했다. 옆 소대 녀석 몇이 찾아와 별 사탕 정량이 몇 개냐고 내게 물었다. 성인이 다 된 놈들이 먹을 거 앞에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서글펐다.

 부산에서 온 3분대장 상복이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찾아왔다.

 “내무반장이 와 저래 악독하기 구는지 아나?”

 “우리 군기 잡을라꼬 그러는 거 아이가?”

 “그기 아이다. 다른 뜻이 있다.”

 “다른 뜻이 있다꼬? 그기 뭔데?”

 “내무반장이 크리스마스 때 특박 간다 안 카드나. 그기 우리한테 사인 준기다, 사인.”

 “사인은 무슨 사인? 그기 무신 소리고?”

 “야 닌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가 잘 모린다. 그기 돈 챙기 달라는 소리다 돈. 우리를 점호시간이나 교육시간에 그래 애믹이는 건 알아서 돈을 챙기 달라는 소린기라.”

 “야 설마 그럴 리가... 그래 그라만 우짜잔 말이고?”

 “우리 소대원들한테 돈을 걷어가 내무반장한테 주는 기 좋을 끼다. 아무도 반대는 안 할 끼다.”

 “아니 그기 무신 소리고? 우예 그런 일을. 야 난 그 짓은 못한다. 난 그 짓 못한다.”

 “넌 사회를 너무 모린다. 사회에서는 다 그런다. 또 그래야 산다. 아마 소대원들한테 물어 보만 다 그러자고 할 끼다. 다른 분대장들하고 상의해보자.”

 분대장을 모두 불렀다. 그들은 모두 그러자고 했다. 다 똑같은 놈들이구나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소대원 모두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자유 시간에 한쪽 내무반으로 소대원들을 모았다. 공개적으로 의사를 물으면 반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을지 모르니 비밀투표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투표 결과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었다.

 한 사람당 1,00원씩 걷기로 했다. 모두 4.000원이 걷혔다. 분명히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녀석도 있었을 텐데 단 한 녀석도 빠지지 않은 건 그만큼 절박했던 때문일까? 내무반장이 특박 가기 전날 상복이가 다른 분대장 한 녀석과 같이 2.000원을 내무반장에게 건넸다.

 “봐라 특박 갔다 오만 분명히 다를 끼다.”

 내무반장이 특박을 떠나고 없는 동안 우리 소대원은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소대원 모두는 내무반장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내무반장은 아주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들 마음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모두 반가운 체를 했다. 내무반장은 아주 기분이 좋은 것 같았고 우리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다. 뇌물 힘이었을까, 기분 좋게 다녀온 특박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내무반장의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호시간이면 또다시 난리 부르스를 쳤고 악쓰는 소리는 내무반에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감한 일이 터졌다. 내무반장에게 뇌물로 바치고 남은 돈 2,000원이 없어진 것이다. 누군가가 훔쳐갔을 것이었다. 소대원들이 믿어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은 돈 2.000원을 잃어버렸다고 실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퇴소할 때 맡겨 놓은 돈을 찾아 다 변상하겠다고 하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무반장에게 상납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무반장에게 치사하게 뇌물을 바치면서까지 군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복이는 입대하기 전 색소폰을 불었지만 군기가 센 군악대는 가고 싶지 않다며 색소폰을 연주한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할 거라고 했다. 하루는 상복이가 점호를 마치고 취침시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잠들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훈련소 기간병인 녀석의 친구가 내무반장한테 외출을 허락받았다는 것이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언제 잠이 들었는지 뭔가가 내 입속을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잠을 깼다. 녀석이 내 모포 속으로 들어와 빵을 입에 물린 것이다. 녀석의 입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났다.  

 “야 임마 괜찮나? 들키만 우짤라꼬 술을 마시고 들어오노?”

 “개안타 내무반장한테 허락받았는데 뭐.”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이 날은 특별히 취침 점호였다. 모포와 매트리스를 깔고 모두 누워 인원 점검만 하는 점호였다. 점호를 마치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들릴 듯 말 듯 노랫소리가 들렸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ROTC 출신 중위로 우리 훈련병들에게 늘 자상하게 대해 주던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형 같은 소대장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가 떠올랐다. 친구 녀석과 둘이서 명동 막걸리 집에 갔었지. 자리가 없어 아줌마 둘과 합석을 했었는데 그 아줌마들은 우리를 베이비라고 부르며 막걸리를 사주었었다. 작년에만도 베이비였는데 올해는 군인이 되었구나.

 당시는 나라 경제가 아주 어려울 때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매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수출도 비약적으로 늘어나 1964년 1억 불을 넘긴 수출이 1971년에는 10억 불을 넘기고 있었다. 정부는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을 외치며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갑자기 오일쇼크가 들이닥쳤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오일쇼크는 세계 유가를 몇 배나 폭등시키고 세계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물가가 엄청나게 폭등하고 있었다.

 군에서는 모든 것을 절약해야만 했다. 훈련소에서 사격훈련은 영점사격 3발을 포함해 딱 9발만 쏘게 했고 수류탄 투척은 시범만 보여 주었다. 사격을 할 때는 혹 탄피를 잃어버릴까 거기에 정신을 쏟느라 사격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신 PRI와 포복, 각개전투 훈련은 아주 빡세게 받아야 했다. 유격훈련, 화생방 훈련 또한 제대로 받았다. 화생방 훈련은 콧물, 눈물이 뒤범벅이 되고 눈과 얼굴이 따가워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견딜만했다. 훈련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때문에 자존감을 잃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6주간의 훈련을 끝내고 퇴소를 하게 되었다. 훈련병 신분을 탈피하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게 된 것이다. 훈련소에서의 6주는 정말 길고도 긴 기간이었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어서는 이 밤이 영원히 새지 않기를 숱하게 빌었다. 새벽에 잠이 깨면 제발 시간이 이대로 멈춰주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퇴소를 하게 된 것이다.

 퇴소를 앞두자 선임분대장들은 훈련소에 자충 될 거라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나돌기도 했고 일부는 카투사로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논산 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했는데 자충이라니 마음을 졸이면서도 카투사로 빠지면 좋겠다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자충은 없었고 카투사도 없었다.

 그렇게 악독하기만 했던 내무반장도 퇴소를 앞두고는 선량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독하게 대해 미안하다며 특히 내게는 자대에 가면 맞을 일이 많을 텐데 뻣뻣하게 버티지 말고 죽는 시늉을 하라고 충고도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헤어진다 생각하니 서운한 생각까지 들었다.

훈련이 끝나 좋기는 했지만 아득한 앞길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배출대에서 헤어질 때 그 간의 정이 그렇게 깊게 들었던지 하나같이 서로를 껴안아 주며 눈물을 훌쩍였다.

 입소할 때 맡긴 돈을 찾아 잃어버린 돈을 변상하고 나니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상복이 녀석이 자대에 가면 필요할 거라며 굳이 500원을 찔러 주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각자 가야 할 부대를 발표하는데 같이 퇴소하는 동기생 수백 명이 중서부전선으로 가게 되는 101 보충대였다. 103 보충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든 많은 동기생들과 헤어져야 했지만 상복이는 물론 입대할 때 기차간에서 만난 인락이와도 101 보충대로 같이 가게 되어 마음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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