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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Aug 08. 2019

철책선(GOP)에서

 중대에 배치를 받고 한 달쯤 지나 철책으로 이동을 했다. 이미 선발대는 철책에 투입되어 교대하게 될 부대와 합동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동은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적군이 교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한밤중에 이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책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서너 시간은 걸어 깜깜한 막사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 중대본부 막사는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있었다. 본부 바로 아래에 3소대 막사가 있었고 우리 막사 위쪽에 대대본부 막사가 있었다. 1소대와 2소대는 중대 본부와 멀리 떨어져 철책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철책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철책은 보이지 않았다. 철책은 산을 넘어가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따금 멀리서 대포 소리가 쿵쿵 울리면 불안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철책에 들어가기 전 대북방송이나 대남방송은 어떤 내용을 어떻게 할까 많이 궁금했다. 부대 교체를 감추기 위해 한밤중에 이동을 하는데도 이동 다음날 아침이면 북측에서 우리 장병들 이름을 불러가며 철책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인사를 한다는  말이 참말일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남방송이나 대북방송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방송 자체를 하지 않은지 한참이 되었다고 했다.

 대신 아침이면 우리 측 스피커에서 싱그러운 봄 공기를 가르며 군가가 울려 퍼졌다. 매일 듣는 군가였지만 지겹지가 않았고 정겹기까지 했다. 혼자 밥을 타 오면서, 때로는 청소를 하면서 군가를 따라 부르곤 했다.

 우리 부대가 위치한 자리는 철의 삼각지 한가운데 예전 김화읍 자리였다. 김화읍은  6.25 때 철저히 파괴되어 김화역사를 제외하고는 집 한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가지 전역이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있었고 군데군데 부서진 담벼락과 우물만 예전 도시 자리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밥은 대대본부 취사장에 가서 타 왔다. 여전히 밥과 국, 김치가 전부였지만 고추장이나 건빵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햄이나 소시지도 수시로 주었다. 생명수당 대신 주는 거라고 했다. 생명수당이란 말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건빵은 식용유에 튀겨 먹었다.  

 밥은 삽으로 버킷에 퍼주었는데 배식 병사는 밥을 많이 퍼주어도 될 것 같은데 삽으로 밥을 사정없이 깎곤 했다. 밥을 타와 배식할 때는 고참들 밥은 살살 흔들어 조금만 담고 내 밥은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도 고참들은 밥을 남겨 내게 주었다.

 어느 날 고참들이 산에서 두릅을 따왔다. 고추장에 찍어 처음으로 먹어보는 두릅 맛은 환상이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두릅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그 맛있던 두릅이 제대하고 먹어보니 아무런 맛이 없었다. 이 무슨 조화일까?

 내무반은 온돌로 되어 있어 저녁에는 불을 때야 했다. 고참들이 불 땔 나무를 해오면 불은 졸병인 내가 때야 했다. 불을 때면서 숯불에 붙여 피우는 화랑담배 맛은 아주 그만이었다. 불을 땔 때는 매운 연기를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따뜻한 불기운을 맘껏 쬘 수 있어 마냥 좋았다.

 이 무렵 화랑담배에 필터가 달려 나오기 시작했는데 담배 길이가 짧아져 병사들 불만이 컸다. 이틀에 한 갑씩 주는 담배가 필터가 달리고부터는 늘 부족했다. 담배 길이가 짧아 피다가 꽁초를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배는 부식 차량편에 보내왔는데 가끔 무슨 이유인지 부식차량이 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부식차량이 두 번을 거르면 근 일주일을 담배 없이 지내야 했다. 부식이야 취사반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병사들은 담배가 오지 않는 것만 걱정했다. 부식차량이 오지 않으면 막사 주변은 꽁초 하나 없이 깨끗해지곤 했다. 바닥에 널려있던 꽁초를 다 주워 피었기 때문이다.

 행정반 고참들은 민통선 밖 연대본부를 수시로 들락거리기 때문에 사제담배를 사 피울 수 있었다. 부식차량이 오지 않아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하다가 고참들로부터 값싼 파고다 담배 한 대 얻어 피우면 그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전방은 넓은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뢰지대였다. 길 주변 모든 곳에 지뢰지대 표시가 되어 있어 어디 한 곳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전방에 갓 들어갔을 때는 겁을 먹고 지뢰지대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않았지만 몇 달이 지나고부터는 지뢰지대를 마구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밤하늘이 훤했다. 이북에서 철책선 주변을 시계확보를 위해 불로 다 태우는 화공작전을 펴는 것이라고 했다. 뒷산을 넘어 불구경을 갔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온 산을 태우는 모습은 아주 장관이었다. 저 불이 남쪽으로 넘어오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하며 그렇게 3,4일을 타다가 꺼진다고 했다.

 가끔 가족을 만나러 외박을 나가는 중대 선임하사인 인사계는 귀대를 할 때면 민통선 초소에서 전화를 했다. 마중을 나와 자전거를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민통선에서 막사까지는 자전거를 타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인사계 전화를 받으면 1Km 이상 떨어진 관망대까지 마중을 나가야 했다. 혹 좀 늦게 마중을 나가기라도 하면 인사계는 아주 짜증을 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기가 너무 힘이 든다고 하면서. 그럴 때면 나는 힘이 들지 않나 속으로만 투덜거려야 했다.

 한참 곤히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누군가가 마구 흔들어 깨웠다. 몇몇 고참이 소주병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니 생각해서 너만 깨운 거야 임마. 마셔.”

 술은 철책에서는 엄격히 금지된 것이었다. 당연히 살 수도 없었다. 고참병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 생창리까지 가서 사 온 술이라고 했다. 걸리면 바로 영창이었다. 졸병은 술보다는 자는 것이 훨씬 좋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감사한 체 마셔야 했다.

 소대원들은 철책선 근무를 서지만 행정반 병사들은 막사 밖에서 동초를 섰다. 매일 밤 한 시간씩 동초를 서야 했는데 그 한 시간은 무척 길고 지루했다.  한 시간도 이렇게 지루한데 철책에서 매일 밤 경계근무를 서야 하는 병사들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까 싶으면서도 짜증이 나곤 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온갖 망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간혹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기도 했다. 총을 든 군인이 이깟 소리에 놀라다니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소대원들은 밤새 철책선 앞에서 보초를 서다가 아침이 되면 철수를 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오전 내 잠을 자고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사소한 작업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주말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배구를 했다. 북한 군인들에게 우리가 자유롭게 운동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소대마다 배구를 한다고 했다. 우리 행정반은 뒷산에 가려 북에서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배구를 했다. 때로 3소대와 시합을 할 때는 우리 행정반은 전원이 나가야 간신히 한 팀을 만들 수 있었지만 3소대는 많은 인원에서 선수를 뽑았는데도 가끔 우리에게 졌다. 그런 날은 3 소대원들 전원이 선임하사에게 아주 작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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