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석 Aug 13. 2019

유성룡도 이순신도 없다

조선을 침략한 왜병이 서울로 진군해 오자 선조 임금은 황급히 임진강을 넘는다. 왜군이 침입한 지 18일 만이었다. 파주 화석정을 태워 불을 밝히고 간신히 임진강을 건넌 왕이 동파역에 이르자 파주목사와 장단부사가 왕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한다.

‘종일토록 굶주린 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이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왕이 먹을 음식을 빼앗아 먹어 임금께 드릴 음식이 없게 되자 파주목사와 장단부사는 겁이 나 도망을 가고 말았다.’

서애 유성룡이 체찰사로 있을 때 한 명나라 장수가 이여송 제독에게 ‘일본과 강화를 원하지 않는 유 체찰이 사자가 왜적의 진영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임진강의 배를 모두 없애 버렸다’고 허위보고를 하여 이여송은 유성룡에게  곤장 40대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져 거짓 보고한 자를 곤장 수백 대를 쳐서 기절한 후에야 끌어냈다.

유성룡이 난이 끝나고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쓴 징비록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굶주림에 지치고 기운이 빠진 적의 장수 소서행장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부르튼 발을 절룩거리며 밭고랑 사이를 기어 달아나는데 한 사람도 나와서 이들을 치는 이가 없고 명나라 군사도 추격하지 않는데 홀로 이시언만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이시언도 감히 이들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적병 60여 명만 베어 죽였을 뿐이다.’

 명의 대군이 조선에 출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는 적군을 요격하라고 유성룡이 황해도 방어사에게 지시를 했다. 그러나 황해도 방어사는 겁이 나서 달아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패주 하는 왜군을 눈앞에 두고도 어떻게 하지를 못했다. '우리 군사들이 도망가지 않고 출동했으면 소서행장 등 왜병은 쉽게 잡을 수 있었을 것이고 함경도에 있었던 가등청정까지도 큰 힘 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유성룡은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임금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저처럼 나라보다는 제 목숨 하나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이순신 장군이나 정발, 송상현, 김시민 등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장군들도 있었고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유정 등 의병들의 분전이 없는 바 아니었지만 제 목숨 하나 지키기 위해 도망가고 숨은 장수와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백성들 가운데는 적의 앞잡이 노릇을 서슴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들은 거들먹거리고 세 불리하면 도망가고 전쟁에 패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신립, 이일 등이 험준한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궤멸당한 충주 전투를 서애는 무엇보다 원통해했다. 탄금대가 아니라 험준한 조령에서 왜군을 막았다면 우리 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길 수도 있었을 전투였다고 서애는 한없이 분해했다.

‘적군이 상주에 있을 때 조령의 삼십 수 리 사이에 사수 수천 명만 매복시켰으면 적군은 우리 군사가 많은지 적은 지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는 적군을 어렵지 않게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합지졸과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 험지를 버리고 평지에서 승부를 겨루었으니 패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른 장수들과는 많이 달랐다.

 명의 수군 제독 진린을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성품이 사납고 포악했기 때문이었다. 진린의 군사들은 조선의 수령을 때리기도 하고 함부로 욕을 하기도 했다. 누가 이를 말려도 듣지도 않았다. 명의 이러한 횡포를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은 이순신의 군사가 진린 때문에 패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걱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진린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이순신은 진린이 원군으로 올 때에 멀리까지 나가 그를 영접하고, 사냥한 고기로 대접하면서 군사들도 풍성하게 대접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의 배가 침입했을 때 적군 머리 40수를 베어 진린에게 주어 모든 공을 진린의 것으로 돌렸다. 이에 감동받은 진린은 모든 일을 이순신에게 물어 시행하고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했으며 백성의 작은 물건이라도 빼앗지 않게 되었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을 가슴에 맞은 이순신이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하고 숨을 거두자 그의 조카 이완은 ‘이순신의 명령이라며 싸움을 급히 독려하였기 때문에 군중에서는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적에게 포위됐다가 이완의 구원을 받아 살아난 다음에야 이완으로부터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된 진린은 의자에서 땅 위로 몸을 던지며 ‘노야께서 나를 구원한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습니까’하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진린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이 이러했다.

종 6품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천거한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전라 좌수사는 정 3품이니 7계단을 뛰어넘은 파격적인 추천이었다. 반대가 극심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상식을 뛰어넘는 승진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단계가 아닌 7단계를 뛰어넘는 추천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이순신을 추천한 유성룡이나 이를 받아들인 선조나 다 범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옥포, 당포해전 승리에 이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자 왜병들은 엄청난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적은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육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고 수군은 서해를 돌아 한강으로 진격해 각종 물자를 지원할 계획을 세웠었는데 이것이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두 달 만에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명군의 참전도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보급로를 차단당한 왜군의 보급이 활하게 지원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진작 도륙이 났을 것이다. 조선은 왜국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 이겼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품 벼슬을 주려했으나 너무 지나친 승진이라며 반대가 심해 정헌대부(정이품)로 승진’시켰다.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던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었다. 원균의 모함과 유성룡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의 공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유년(1597) 1월이었다. 이순신이 적장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었는데도 명령을 어기고 잡지 않았다는 죄목이었다.

적장 소서행장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간첩 요시라를 보내 이르기를 ‘명과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등청정 때문이므로 나는 그를 미워하는데 아무 날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널 것이니 그를 기다려라. 그러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우라고 재촉을 거듭했지만 간계가 있을까 의심한 이순신은 나가 싸우지 않았다.

 ‘가등청정이 벌써 상륙했는데 어찌 요격하지 않느냐’고 요시라가 다그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 대해 국문을 청하고 일부는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선조는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한산도로 보내 이순신을 사찰하도록 했다. 남이신이 한산도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남이신의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했지만 ‘7일이나 머문 가등청정을 잡지 않고 이순신이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쳤다’고 남이신이 보고하는 바람에 이순신은 끝내 하옥당하고 말았다. 모두가 이순신이 당한 무고를 외면했지만 오직 판중추부사 정탁만이 이순신을 끝까지 변호해 이순신은 한 차례 고문과 삭탈관직으로 그 죄를 대신하고 군대에 편입될 수 있었다. 이로써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순신은 칠천량 전투에서 궤멸당한 원균의 뒤를 이어 다시 3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에서 부터 난이 끝나는 무술년(1598)까지 7년간을 기록한 일기문이다. 장군은 이 일기에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정조 때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일기문에 난중일기란 이름을 붙여 후세인들이 이를 이름처럼 부르게 되었다.

난중일기는 날짜와 날씨를 쓰고 그날 만난 사람들과 그 날 있었던 일을 적었다. 무기를 만든 일이나 전쟁에 대한 기록을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나라의 제삿날과 집안 제삿날을 기록하고 사람에 대한 평가와 생각을 적었다.

나라 걱정뿐 아니라 가족 걱정과 어머님 걱정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아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니 다행 다행이다’는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꿈이 예지몽일 때가 많았다. 장군이 군율을 어긴 자를 목 베고 처형한 기록도 자주 나오고 부하들이 백성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기록도 자주 보인다.

난중일기를 통해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도 막내아들 면의 전사에 대한 소회가 압권이다. 정유년 시월 열나흘 기록이다.

‘맑음. 사경에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시내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엎디어 나를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옆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더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무술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철군하는 왜의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적탄을 맞고 숨진다. 장군이 전사하던 이날 유성룡은 영의정을 파직당하고 이후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 하회로 돌아와 징비록을 쓴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어디로 갔는가? 이 시대 이 나라에 이순신이, 유성룡이 없을 턱이 없다. 유성룡의 혜안과 예지력, 나라 사랑 정신을 두루 갖춘 인재가 없을 리가 없다. 이순신의 전술과 용맹, 지혜와 애국심을 두루 갖춘 장수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을 알아보는 백락의 눈을 가진 지도자가 없을 따름이다. 시대가 요구하고 시대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가지지 못함을 그저 탄식만 하고 안타까워 하기만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위중하다.

작가의 이전글 철책선(GOP)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