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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Aug 19. 2019

졸병들의 비애 1

 무슨 이유에서인지 행정반이 산 아래쪽 막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대 PX가 쓰고 있는 막사 한쪽 편이 비어 있어 그쪽으로 옮긴 것이다. 막사 바로 옆으로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빨래나 식기 닦기에 그만이었다. 한 여름에는 언제든 더위를 씻을 수 있어 좋았다. 막사 옆 피마자, 들깨 밭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민통선은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지만 농사는 지을 수 있었다. 민통선 안에는 생창리라는 마을도 있었다.

 행정반이 이사를 하고부터는 저녁 점호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사하기 전까지는 3소대와 함께 점호를 받았지만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는 행정반만 동떨어져 있어서인지 점호는 생략되었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하고 식기 닦기를 마치면 대대본부로 문서수발을 다녀야 했다. 대대본부 병사들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장교들도 늘 반겨 주었기 때문에 한참씩 그들과 어울려 놀다 오곤 했다. 전방에서는 이동 중에는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다녀야 했지만 문서수발을 다닐 때는 철모를 쓰기가 번거로워 화이버만 주로 쓰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지프차를 타고 오는 대대장에게 그만 걸리고 말았다. 힘차게 붙인 경례가 화근이었을까? '백골' 힘찬 경례 소리에 대대장은 차를 멈추더니 '왜 철모를 쓰지 않았느냐'라고 묻더니 중대장에게 대대장한테 전화하란다고 전하라고 했다. 이제 영락없이 영창이구나 불안한 가슴을 안고 중대장께 보고를 하자 중대장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중대장이 뭐라고 보고를 했는지 그 일은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갔다. 중대장이 고맙고 형님 같은 믿음이 갔다.

 봄이 깊어지면서 나무는 나날이 생기를 더해 갔다. 문서수발 때마다 오르내리는 산길은 연초록빛으로 뒤덮여 아름다웠고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다. 그 누구의 간섭을 받을 일도 없었고 눈치 볼 고참도 없었다. 싱그러운 숲길을 걷는 재미는 문서수발의 노고를 덜고도 남았다.

 어느 날 처음 보는 병장 하나가 중대장실에 들렀다 나오더니 인사계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누구길래 저렇게 건방지나 싶어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인사계는 그에게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둘이서 뭐라고 몇 마디 소곤거리더니 인사계는 우리에게 쌀 몇 가마를 그가 타고 온 지프차에 실으라고 했다. 보안대 병사였다. 그는 가끔 중대본부를 찾아와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지프에 싣고 가면서도 우리 졸병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았지만 하는 짓이 영 마뜩잖았다. 장교처럼 머리를 기르고 복장상태는 늘 불량했고 우리 졸병들에게는 반말 지꺼리를 하면서 아예 고참 행세를 했다. 녀석이 상당히 고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제대를 할 때까지도 녀석은 병장인 상태 그대로 제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녀석이 달고 다니던 병장 계급장이 마이 가리 즉, 가짜였던 것이다. 보안대 병들은 이등병 때부터 모두 병장 계급장을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설마 그 녀석이 그럴 줄이야...

 왕사수가 전역을 하게 되었다. 졸병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은, 졸병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토닥여주던 , 특별히 나를 아주 많이 보살펴 주고 아껴 주던 큰 형님 같은 선배였다. 3대대 서무병들이 전역 축하 겸 이별식을 한다며 내게도 참석을 하라고 했다. 남대천에서 잡은 메기로 매운탕을 끓여 막소주를 마셨다. 노래하고 춤추며 신나게 놀았지만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전쟁에도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라 누구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모두가 하늘 같은 고참들 뿐이라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지만 술자리가 점차 익어가면서 술기운에 힘입어 아주 잘 어울렸던 모양이었다. 늘 나를 아껴준 왕사수 백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술자리가 파할 때쯤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얼핏 정신이 들었는데 누군가의 등에 업혀가고 있었다. 직속 사수 등이었다. 편안하고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선지 겁도 없이 사수 이름을 부르며 “군대 참 좋다 그자? 졸병이 이렇게 고참 등에 업혀 가기도 하고” 그리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몇 시나 되었을까? 뒤늦게 눈을 뜨자  내무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몹시 쓰린 가운데 불안이 엄습해 왔다. 어제 일이 주마등같이 지나가며 이제 죽었구나 싶으면서도 ‘에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돼라’ 그냥 자는 체하며 누워 있기로 했다. 누군가가 죽을 끓여 왔다며 깨웠다. 바로 위 고참이었다. 마지못해 일어나긴 했지만 황송하고 불안해 먹을 수가 없었다. 입맛도 없어 몇 숟가락 뜨다 말았다. 사수와 다른 중대 서무계 고참들이 교대로 그 먼 길을 업고 왔다고 했다. 힘들게 나를 업고 왔을 사수는 혼을 내거나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싱긋이 웃으며 중대장이나 인사계한테 들키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했다. 다음 날이 6.25라 비상이 걸렸다. 때문에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다음 날 비상이 해제되고 일상으로 돌아와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한 고참이 화장실 앞으로 우리 졸병들을 집합시켰다. ‘엊저녁에는 그냥 반쯤 죽여 놓으려고 했는데 하루 밤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풀렸다’며 몇 마디 잔소리만 하고는 그냥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잘못도 없이 집합을 당한 바로 위 고참과 후임 병사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고 며칠 동안 고참들 보기가 민망하고 황송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왕사수가 전역을 하고 편지를 보내왔지만 답장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편지 답장을 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지는 몰랐다. 편지 한 통을 보내지 않았다가 수십 년을 가슴에 큰 응어리를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정말 의리 없는 놈이라고 얼마나  욕을 할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대 본부에 배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대 음어 경연대회가 곧 열린다며 음어 연습을 하자고 왕사수가 말했다. 며칠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숫자를 글씨로 푸는 해역은 답을 빼냈다면서 글씨를 숫자로 만드는 조립만 연습하라고 했다. 숫자를 빨리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처음 나가는 대회이고 연습 또한 며칠밖에 하지 않아 성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덜컥 1등을 하고 말았다. 중대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기쁨은 고사하고 부끄럽기만 했다. 답을 사전에 알고 나갔으니 그게 뭐가 자랑스러웠겠는가?

 PX옆으로 이사를 하고도 가끔 3소대에 놀러 갔는데 한 번은 한 고참이 자신의 명찰을 뜯어 내게 주면서 PX에 가서 빵을 좀 사 오라고 했다. PX에서 명찰도 잡혀주나 생각하며 고참 얼굴과 명찰을 번갈아 보다가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이백원’이라고 명찰에 씌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이 백원'이었던 것이다. 그 고참이 내 다리에 수북이 난 털을 보더니 씩 웃으며 털 한 개를 100원에 팔라고 했다. 웬 떡이냐 싶어 얼른 100원을 받고 팔았다. 무르자고 하면 안 된다는 다짐과 함께. 그 고참은 다리털 하나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이백원이 꺼’ 하고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표시가 지워지지 않게 하라고 하고는 털은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며칠 후 3소대에 또 놀러 갔더니 그는 ‘내 털 잘 있지? 내 털 가지고 온나’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지를 걷게 하고는 그 털을 당겼다 놓았다 장난을 치며 노는 것이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무르자고 통사정을 하자 ‘무르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하며 놀리는 그를 사정사정하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냇가에서 혼자 식기를 닦고 있는데 고참 한 사람이 와서는 다짜고짜 주머니에 있는 걸 다 꺼내라고 조용히 말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빨리 꺼내기나 하라고 윽박질렀다. 담배와 라이터 말고는 있을 게 없었다.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그는 내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엊저녁에 훔친 돈 어디 두었느냐'라고 다그쳤다. 이게 뭔 소린가, 돈을 훔쳤다니? 모두가 잠자고 있을 때 내가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을 훔치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사사건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람이 밉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줄을 몰랐다. 밤에 상황 근무를 설 때 잠자고 있는 놈을 쏘아버릴까도 생각했다.

 철책에서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페바로 철수를 하고 평온한 생활을 하던 중 사사건건 나를 못마땅해하던 그 고참이 저녁 무렵 행정반원 전원을 창고로 집합하라고 했다. 그는 우리 부대 제일 고참이 되어 있었고 나는 행정반에서 서열이 세 번째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행정반 모두가 자신을 우습게 안다면서 5파운드 곡괭이 자루를 들고 씩씩거리며 모두 엎드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맨 아래 졸병부터 엉덩이를 치려고 했다. 무슨 잘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맞아야 한다는데 화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졸병들에게 모두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참 말이 말 같지 않아? 새끼들아.’ 빽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졸병들은 모두 일어났다. 그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졸병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나를 치십시오.”

 “그게 어떻게 니 책임이냐 내 책임이지” 바로 위 고참이 소리를 지르더니 나보고 일어나라고 하고는 조용히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고참과 둘이서 서로가 맞아야 한다며 옥신각신하자 그 고참은 곡괭이 자루를 집어던지더니 ‘니들 멋대로 해라 새끼들아’ 하고는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 고참이 얼마 후 전역을 하게 되어 송별회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졸병들이 그 회식에 참석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간신히 어르고 달래 회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전역 당일 그를 배웅하러 나가지는 못하겠다고 또 버티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전역할 때는 전 중대원이 위병소까지 도열하여 박수로 축하하며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와 바로 위 고참 둘이서만 중대원들과 함께 그를 배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병사가 미웠어도 배웅대열에  졸병들은 다 빠지고 둘이서만 그를 보내려니 미안하고 참 안 된 생각이 들었다. 전역을 한 그가 중대본부 요원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나까지 답장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싶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자주 편지를 주고받자는 회신이 왔지만 나도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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