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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Aug 23. 2019

졸병들의 비애 2

매일 똑같은 생활에 군 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편하게만 보내려고 군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군에서는 많은 고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에서 고생을 하며 담금질을 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군문을 나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군에 가야 했고 가급적 최전방 부대까지 가야 했다.

 대학 1학년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게 보냈었다.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바닷가를 놀러 다니느라 시험을 한 과목도 보지 않았다. 1학년 1학기 학점은 교련과 체육, 영어 Lab을 제외하고는 모두 날려버렸다. 학사경고는 당연한 것이었다. 2학기에는 정신 좀 차려야겠다고 작심하고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데모로 날을 새던 시절이라 학교가 위수령으로 휴교를 하면서 그것이 방학으로 이어지고 기말고사를 대신했던 리포트를 한 과목도 제출하지 못했다. 휴교 기간 중에 군 입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1년에 1개월씩 군 복무기간이 단축되는 교련 혜택조차 받지 못했다.

 군 입대는 엉망인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계기를 만들어 줄 도구가 될 것이라 믿었다. 모두 가기 싫어하는 군대였지만 입대 영장이 오히려 반가웠다. 군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생은커녕 편하기만 한, 소위 끗발까지 있다는 말단 중대 서무계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나 자신을 어떻게 담금질하고 정신 자세를 새롭게 가꿀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루하루는 시간만 죽이는 의미 없는 나날이 되고 있었다. 군에서 어떻게든 고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그 당시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고생을 할 방법은 DMZ내 GP에서 근무를 하는 수색중대로 가는  뿐이었다. 수색중대는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아야 갈 수 있었는데 특수훈련이 내가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수색중대는 대부분 병사들이 차출될까 겁을 냈기 때문에 지원서만 내면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원서를 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수색훈련 차출 부서인 연대 정보과에서 근무하는 훈련소 동기, 인락이 녀석에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야 그거 내가 뺐다. 수색훈련은 무지하게 뺑이치는 훈련인데 그걸 아는 내가 널 우째 보내겠노. 더군다나 수색대는 사고 위험도 무지 크잖아. 그래 내가 니 지원서를 뺐다”  

 “야 임마 내가 가겠다는데 왜 니가 빼노. 또 지원서를 제출할끼다. 이번에는  절대 빼지 마라. 알았지?”

 “보내봤자 허탕이다. 내가 또 뺄끼다. 보내지 마라.”

 이후 몇 차례나 지원서를 보냈지만 그때마다 허탕이었다. 정보과장에게 매달려도 봤지만 그 또한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정보과에서는 사단 정보처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사단 정보처에서 음어 잘하는 내가 필요하다고 원할 뿐 아니라 자기들도 내가 사단으로 가면 편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생하겠다는 놈을 더 편하고 힘 있는 곳으로 가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 중대장이 ‘보안대에서 널 조사할 것이 있다고 들어오라고 하는데 뭐 짚이는 거 없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를 일이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연대 보안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안대 병사는 대뜸 내 친구 이름을 대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친구라고 대답을 하자 책상 서랍을 여닫으며 뭔가를 읽는 체하며 ‘친구한테 왜 돈을 보내라고 했느냐’ 다그쳤다.

 “돈이라니요? 그런 사실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분명히 니가 돈을 보내라고 했다고 편지에 써져 있는데. 왜 돈을 보내라고 한 거야?”

 “돈을 보내라고 한 사실은 분명히 없습니다. 일전 휴가를 갔을 때 그 친구에게 PX 빚 걱정을 한 적은 있지만 돈을 보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내가 돈을 좀 구해 볼게’라고 한 적은 있었습니다.”

 “이거 말로 해서는 안되겠구만. 엎드려.”

몽둥이를 든 그 병사는 죽일 듯한 기세로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환장할 일이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하면 불 때까지 때릴 게 뻔하고 돈을 보내라고 했다는 거짓말을 할 때까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돈을 보내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짜식 진작 그럴 것이지. 너 정말 나쁜 놈이네. 친구한테 꼭 돈을 맡겨놓은 거 같이 돈을 보내라고 하고”

거짓말하라고 강요할 때는 언제고 나쁜 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건 또 뭔가. ‘평생 이런 짓이나 하며 살아라 새끼야’ 마음으로 저주하며 보안대를 나왔다.

 중대장한테 사실대로 보고를 하자 중대장은 영창을 가지 않도록 노력을 해 보겠다며 너무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 중대장이 어떤 노력을 한 결과였던지 그 일은 문제없이 넘어갔다. 돈을 보내라는 것은 사신 위반이었다. 편지를 보낼 때는 사전 검열을 위해 겉봉을 봉하지 않고 상급부대로 보내야 했다. 때문에 검열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편지를 써야 했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나중 휴가를 가서 그 친구로부터 편지건을 묻자 ‘약속한 대로 돈을 보내려고 했는데 돈 마련이 쉽지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고 하면서 몹시 미안해했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 중대에서 세 명의 병사가 죽었다. 휴가를 가서 자살한 병사 외에 철책에서 한 명, 페바 부대에서 한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철책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지뢰사고는 다행히도 우리 중대에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여름 어느 날 야간 경계 근무를 마치고 병사들이 곤히 자고 있던 아침나절에 큰 사고가 났다. 야간 경계초소 근무를 마치고 연이어 탄약고 근무를 계속 서고 있던 한 병사가 모두가 자고 있는 자신의 내무반에 난입해 총을 난사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고 있는 동료들을 쏘지는 않고 내무반 천정을 향해 카빈 소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개울을 건너 중대 본부를 향했다. 람보처럼 실탄을 X자로 양 어깨에 걸치고 수류탄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거총 자세로 중대본부를 향해 가는 그의 모습은 늠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중대본부에서 상황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는 혼비백산하여 창문을 넘어 피마자 밭으로 도망을 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대대장도 지프차를 타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대대에 문서 수발을 갔다 돌아오던 나는 콩 볶는 듯이 들려오는 총소리에 대대본부로 되돌아가 상황설명을 들으며 그곳에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5분 대기조가 출동하고 전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그 병사가 관망대를 넘어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인 생창리를 향하기 시작하자 5분 대기조에 사살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5분 대기조 병사들은 그 병사가 아닌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한다. 한 솥밥을 먹으며 같은 내무반에서 뒹굴던 전우를 향해 차마 총을 쏘지는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마을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며 간간히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아대던 그가 5분 대기조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5분 대기조의 총이 불을 뿜었고 그 병사는 들고 있던 수류탄을 놓치면서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고 한다.

 부산 출신으로 일병이었던 그 병사는 문제 병사가 아니었다. 다른 전우들과도 잘 어울렸고 성격도 밝은 편이었다.

 사고가 난 그날 그 병사는 야간 잠복근무 중에 졸다가 순찰을 돌던 분대장에게 들켰다고 한다. 고참 병사와 둘이서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고참 병사가  잠시 눈을 붙이라고 해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다가 고참 병사까지 깜빡 조는 바람에 순찰을 도는 분대장이 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분대장은 ‘이따 철수하고 보자’는 뼈 있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날이 밝아 야간 잠복호를 철수한 병사들이 잠도 자지 못하고 그 분대장으로부터 기합을 받고 있는 모습을 탄약고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자기 때문에 전우들이 그렇게 기합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병사는 사살되었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고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사고의 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 그는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 분대장이 평소 병사들에게 했던 괴롭힘은 모두 덮이고 있었다.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 앞에 모든 것은 철저히 왜곡되고 덮였다.

 서무계로서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보고서를 만들어 등사기로 등사하기 무섭게 누군가가 와서는 그 보고서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수없이 찾아오는 장교와 하사관, 병에 이르기까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보고서를 찾았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보고서는 진상을 알리는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에 작성에 아주 신중을 기울여야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지시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작성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그 병사가 모든 것을 잘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병사에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간의 철책 근무를 마치고 페바 부대로 나왔다. 병사들은 말이 군인이지 노무자나 다름없었다. 4월 초부터 10월까지 산에 텐트를 치고 작업을 해야 했다. 철조망 작업과 벙커 구축 작업이었다. 때로는 바위 덩어리도 깨야 했고 흙을 퍼 나르기도 했다. 벙커 작업을 할 때는 횃불을 켜들고 야간작업까지 해야 했다. 시멘트가 굳으면 안 되기 때문에 시작하면 끝낼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벙커 작업이다. 가끔 대대장이 인심 쓰듯 주는 주말 휴식 말고는 주말도 없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얻은 일요일 오후 휴무였다. 병사들은 부대 막사로 복귀하여 밀린 빨래도 하고 PX에서 막걸리도 사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호도 취침 점호였다. 오랜만에 맛본 자유였다. 이튿날 기상나팔이 불고 모두가 일어나 침구정리를 하는데 한 병사가 일어나지를 않고 있었다. 전입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신병이었다. 옆자리 병사가 흔들어 깨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부검 결과 그 병사는 뇌암을 앓고 있었는데 본인은 모르고 있었을 거라고 했다. 뇌종양이 온 머리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많이 아팠을 것이지만 졸병이라 아프다는 말을 못 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그 사건은 넘어갔다. 그날 일요일 휴무일, 그 병사가 일부 고참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고 그뿐이었다.

 그 병사는 유독 나를 많이 따랐다. 살갑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뇌암이 급작스럽게 죽을 정도로 심했다면 굉장히 아팠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무리 졸병이라도 같은 졸병들에게라도 아프다는 말을 했을 터인데 설마 뇌 암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때까지 시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 모습이 몹시 궁금했다. 내무반 한쪽 구석 그가 자고 있던 자리에 그의 시신이 모포로 덮여 있었다. 창문은 모두 등화관제용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내무반은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했다. 내무반으로 뚜벅뚜벅 들어가 모포를 걷고 죽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에 하얗게 백태가 끼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리 뒤끝이 쭈뼛 일어섰다. 그 날 이후로 시신이 뉘어져 있던 그곳 부근도 가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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