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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Aug 27. 2019

인사계(중대 선임하사)

  전방에서는 짬밥이라 불리던 잔반이 많이 남았다. 10여 명이 근무하는 행정반에서도 짬밥 처리는 골칫거리였다. 남는 짬밥을 처리하기 위해 개를 길렀다. 짬밥을 먹고 자란 개는 금방 큰 개로 자랐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개는 보는 사람마다 입맛을 다시게 했다. 된장을 바르자(잡아먹자는 은어)고 개를 보는 사람마다 아주 성화를 부렸다. 

 햇살 좋은 어느 일요일 아침, 인사계가 가마솥과 함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가로 개를 끌고 가라고 했다. 소대나 대대 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철모를 쓴 머리에 가마솥을 이고 남대천 냇가로 향했다. 가마솥의 무게가 목을 짓눌러 목이 끊어지는 듯 아팠지만 중도에 쉴 수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쫄래쫄래 잘도 따라오던 개는 두 명의 고참을 따라 나무숲으로 사라졌다. 주워 온 땔감으로 불을 피우고 솥에 물을 끓여 개를 삶았다. 삶은 개고기는 아무런 맛이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했다. 인사계 부인이 마늘, 파와 소금으로 양념을 했는데도 그랬다. 고기는 거의 먹지 못하고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고기는 인사계가 일부 집으로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사무실로 가지고 왔지만 아무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대장 전령이 보신탕으로 끓여 끼니때마다 중대장과 인사계에게 주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대대까지 퍼졌다. 문서수발을 갈 때마다 대대 장교들이 ‘의리 없는 놈들, 개를 잡아먹고도 입을 싹 닦다니’하며 다그치기도 했다. 개 잡아먹은 걸 부인도 시인도 할 수 없어 난감했다.

 인사계가 토끼를 길러야겠다면서 행정반 옆 공터에 토끼집을 지으라고 했다. 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토끼집이 아니라 땅을 파서 견고한 토끼집을 지으라고 했다. 한 삼일을 낑낑거리며 집을 짓고 나자 인사계는 만족한 웃음을 웃었다. 인사계는 어디선가 토끼를 구해왔다. 졸병들에게 토끼풀 뜯는 임무가 하나 더 늘어났다. 토끼는 땅 속에다 굴을 파고 들어가 밥 먹을 때 말고는 잘 볼 수도 않았다. 토굴 속에 토끼가 몇 마리나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철책을 철수할 때 토끼는 가지고 오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그 토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사계가 우리 몰래 잡아서 처리를 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인사계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짬밥을 버리는 것이 아깝다며 인사계는 또 오리를 키워야겠다고 했다. 개울이 막사 바로 옆이어서 오리 키우기에는 그만이었다. 오리가 밤에 도망가거나 짐승에게 잡아먹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저녁에는 이 놈들을 집에 가두어야 했다. 저녁마다 오리를 집에 가두어야 하는 또 다른 귀찮은 일이 생겼다. 인사계가 잔소리를 하거나 우리를 못살게 굴거나 하면 오리에게 대신 분풀이를 했다. 오리를 운동시킨다며 오리를 몰고 나가 막사 주변 도로를 돌며 구보를 시켰다. 오리를 뒤에서 쫓으면 오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뒤뚱거리며 뛰다가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그 모습이 우습고 재미가 있어 해 질 녘마다 오리를 몰고 구보를 시키곤 했다. 그 오리도 그냥 두고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철책을 철수할 때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인사계나 소대 선임하사들은 말끝마다 욕설이었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일상적으로 썼다. 자연스럽게 병사들은 그 욕을 배워 그들과 함께 욕을 일상적으로 썼다. 병사들은 인사계가 보이지 않을 때는 인사계를 ‘똥싸개’라고 불렀다. 

 외박을 다녀오는 인사계에게 힘차게 경례를 붙이자 자전거를 세우면서 인사계는 다짜고짜 행정반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뒤따라 행정반에 들어서자 갑자기 인사계는 내  명치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불시에 당한 일격에 그만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인사계는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해댔다. 영문도 모르고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왜 때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한참을 맞았다. 아프고 분한 것보다 고참들과 졸병들 보기가 창피하고 민망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중대장의 이쁨을 받는 것이 인사계 눈에 많이 거슬렸던 것 같았다. 중대장은 눈에 드러나게 대놓고 나를 편애했다.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던 중대장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곤 했지만 그것 때문만으로 이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은 중대장이 자리를 비우고 없을 때였다.

 처음 행정반 서무계 조수로 임명을 하면서 인사계는 행정반에서는 돈이 필요할 때가 많다며 그 돈은 집에서 가져다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는 돈이 어디에 필요한지 알 수가 없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사수가 전역을 하고 내가 서무계 사수가 되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종이나 볼펜, 등사지, 등사 잉크 같은 각종 행정비품을 알아서 조달해야 했고 수시로 가야 하는 연대 출장비도 알아서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중대에는 그런 비용으로 쓰라고 매월 도급비가 꽤 지급되고 있었지만 우리 졸병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중대장과 인사계가 어디엔가 쓰는 것 같았지만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느 일요일 인사계가 자기 집 사방사업 부역을 다녀오라고 했다. 인사계 집은 민통선 밖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부대에서 두 시간 이상을 걸어 민통선 밖까지 나가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멀긴 했지만 오랜만의 외출이라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민간인들을 볼 수 있고 인사계 집에서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바로 위 고참하고 둘이서 인사계 집을 찾아가자 인사계 부인이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군복을 인사계가 입었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나무를 심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들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군인에게도 봉급날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당시 병장 봉급이 2,260원이었는데 병사들에게는 꽤 큰돈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PX에서 군것질이나 술 마시는 것 외에는 돈 쓸 일이 없었다. 외출을 나갈 수도 없었고 외박은 전방 병사들에게는 제도 자체가 없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PX 외상 때문에 병사들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행정비품을 사야 하고 연대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는 서무계는 봉급으로는 도저히 한 달을 살 수가 없었다. 연대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라고 유혹을 하기도 하고 PX 차용 쓰기 사다리 타기도 해야 했고 PX에서 막걸리도 마셔야 했던 것이다. 돈은 늘 모자랐고 PX 외상은 늘어만 갔다. PX 외상값 몇 천 원을 고민하는 자신이 참 한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월급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저축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대할 때 꽤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남들 사다리 타기를 할 때도 막걸리를 마실 때도 함께 하지 않는 독종들이었다. 분명 제대를 하고 나가면 큰돈을 모을 사람들이었다. 

 PX 외상은 휴가를 가거나 누가 면회를 와서 용돈을 주지 않는 한 갚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가면 늘 외상 문제는 해결되어 있었다. 누군가 면회를 와서 해결을 해 주기도 했고 휴가를 다녀오면서 해결을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긍정적인 사고는 후일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월급을 지급하고 나면 연대 경리계로 가서 정산을 해야 했다. 정산을 할 때는 단 1원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하사관들이나 장교는 몇 사람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월급을 꽤 많이 받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어느 추운 월급날 철책 근무를 하던 소대 선임하사에게 월급을 타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 인사계가 그 선임하사의 월급봉투를 달라고 하더니 그 봉투에서 얼만가의 돈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무 소리하지 말고 모른 체하고 있으라고 했다. 장난을 치는 줄만 알았다. 

 “돈이 맞는지 세어 봐.” 인사계가 선임하사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맞겠지요 뭐.” 

 “나중에 딴 소리하지 말고 세어 봐.” 

인사계는 거듭 세어보라고 했지만 선임하사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나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소대로 돌아간 선임하사로부터 돈이 부족하다는 전화가 왔다. 아까 확인해 보라고 했는데 그때는 아무 소리 안 해놓고는 돈이 부족하다니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며 인사계는 오히려 호통을 쳤다. 곧 선임하사가 행정반으로 달려왔지만 인사계는 요지부동이었다.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선임하사가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사계가 무서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하사관들은 학력이 낮았고 하사관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장교로 제대하고 다시 부사관으로 들어가는 사례가 많지만 당시는 대부분 병사들이 하사관 지원을 아주 꺼려했다.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특전사에서 전출을 온 선임하사가 있었다. 그가 장기복무를 하게 된 사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인품이 아주 고결했다. 성을 내는 법이 없었고 늘 소대원 편에서 소대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려고 애를 썼다. 병사들은 고충이 있을 때면 그 선임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PX 외상값이 밀리면 그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그 선임하사는 같은 소대에서 근무하는 하사가 소개해준 아가씨를 사귀고 있었다. 그는 그 여자 친구에게 하사관 신분이 밝혀질까 몹시 두려워했다. 여자 친구가 자신이 하사관이라는 것을 알면 떠나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 친구가 면회를 올 때면 중사 계급장을 떼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만나러 나가곤 했다. 그 여자 친구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제대를 하면서 꼭 그녀와 결혼이 성사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75년 2월 국민투표가 있었다. 유신 헌법 존속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이를 대통령 신임 투표로 간주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국민투표가 시행된 것이다. 병사들은 모두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하고 군에서 투표를 했다. 우리 행정반에 기표소가 설치되고 상급부대에서는 기표소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점검을 나오기도 했다. 부재자 투표 기간이 되자 장병들에게 봉투에 담긴 부재자 투표용지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병사들은 철책 근무 시간을 피해 행정반으로 투표를 하러 왔다. 투표를 하러 온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찬성 란에 기표를 해야 한다고 교육을 하고도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병사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기표소에 들어가려고 하면 ‘야 내가 보는 내 앞에서 찍어’ 하고는 어디에 찍는지를 눈으로 확인을 했다. 기표소는 눈가림용이었고 때문에 반대표는 한 표도 나올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내게도 투표용지가 배달되었다. 인사계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투표를 하라고 했다. 인사계 눈앞에 투표용지를 펼쳐놓고는 반대쪽으로 기표용구를 짐짓 가지고 가는 척 하자 인사계는 눈을 부라리며 어디에 찍으려는 거냐며 소리를 빽 질렀다. 인사계를 놀리려고 한 일이었는데도 인사계는 기겁을 하는 것이었다. 1975년 2월 12일에 시행된 국민투표는 70% 넘는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아마 군에서는 100% 가까운 투표율에 100% 가까운 찬성표가 나왔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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