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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02. 2019

군 인사행정의 요지경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군 졸병들에게도 첫째 관심사는 진급과 휴가였다. 외출이나 외박은 전방 부대에서는 장교나 하사관 같은 직업군인 외에는 아예 허용조차 되지 않았고 직업군인도 철책에 근무할 때는 한 달에 한, 두 번  외박을 나갈 수 있을 뿐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장교나 하사관은 아예 그 외박조차 나가지 않았다.

 휴가 서열은 엄격히 정해져 있었고 그 서열은 정확히 지켜졌다. 그러나 진급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병사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진급측정을 받고 진급을 할 수 있었지만 진급을 할 수 있는 기간은 학력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이병에서 일병진급 연한에 차등을 두지 않았지만 상병이나 병장 진급에는 학력에 따라 그 기간에 차등이 심했다. 중졸 이하는 진급하기 위한 소요 기간이 길었고 고졸 이상은 상대적으로 짧았다. 따라서 중졸 이하는 한 번이라도 측정에서 탈락하거나 심사에서 탈락을 하면 병장 진급은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측정에서 통과가 되었더라도 심사에서 통과할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때문에 학력이 낮은 병사는 병장 진급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학력으로 진급이 좌우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책에 근무하는 병사들 대부분은 학력이 아주 낮아 중졸 이하가 대부분이었고 그 가운데도 국졸자가 태반이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입대한 병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국졸자로 햑력은 낮았지만 작업을 할 때나 훈련을 할 때  몸을 사리지 않았고  겁을 내지도 않았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 척척 잘 해냈다. 싸리비나 눈 치우는 가래, 담가 같은 것은 이들이 아니면 만들 수가 없었다. 이들은 총도 잘 쐈고 훈련에도 아주 극적이었다. 밥도 잘 먹었고 철조망 작업이나 돌 깨기, 벙커 작업 같은 힘든 일에도 요령 피울 줄을 몰랐다. 반면 서울이나 대도시 출신 병사들은 학력은 다소 높았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다. 서투르더라도 부지런하거나 열심히 하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빤질거리고 요령을 피우고 편하게만 지내려고 했다. 그러면서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진급은 먼저 했다. 저학력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불평하지도 않았다.

 상병 진급측정을 한다고 원서를 내라고 했다. 나와 전입을 같이 온 동기들은 물론이고 나보다 한참 고참인 병사들조차도 진급대상이 되지 못할 때였다. 중대장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라면 두 박스를 대대 작전과에 가져다주고 진급측정 결과를 받아 오라고 했다. 진급측정을 하지도 않았는데 측정 결과를 받아오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라면 두 박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대대본부로 갔다. 작전장교는 측정 결과 용지를 주면서 점수는 알아서 써넣으라고 했다. 측정도 받지 않고 점수를 알아서 써넣으라니 난감했다. 대대 작전과에 근무하는 대학 선배가 만점 가깝게 써넣으면 된다고 했다.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 합격 점수보다 약간 높게 써 놓고는 눈치를 살폈다. 진급이 안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선배는 걱정을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대 인사과에 진급 서열 명부를 작성해 올려야 했다. 서무계 사수는 축구 합숙훈련을 하느라 부대를 떠나 있어 내가 서무계 업무를 도맡아 해야 할 때였다. 상병 진급 서열 명부 맨 끝에 내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내 위 몇 사람이 탈락하고 맨 끝에 있었던 나는 상병으로 진급되었다. 탈락한 고참들에게 미안했고 무엇보다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축하를 해 주는 동기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입대한 지 15개월 남짓 지나서 병장이 되었다. 동기들은 아직 일병을 달고 있었고 나보다 한참 고참들까지 일병을 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빠른 승진이었다. 승진 신청자 명부 맨 끝에 내 이름을 올렸지만 연대 인사과에서는 다른 사람을 제치고 승진을 시켰다. 서무계는 그렇게 혜택을 받았다. 아직 상병 진급도 하지 못한 동기뿐 아니라 나보다 한참 고참들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겸손해야 했고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도 고참 일병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깍듯이 고참 대접을 했다. 나보다 고참인 일병이나 상병들은 내게 말을 놓기도 하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내가 상병 진급을 하던 달에 우리 중대 진급자가 대대에서 제일 적었다. 그것도 표가 나게 적었다. 중대장께 보고를 하면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사수가 인사에 관해 아무런 얘기가 없었느냐고 물었다. 없었다고 하자 연대 인사과와 관계를 잘 가져야 한다면서 그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다른 중대 고참 서무계들에게 우리 중대 진급자가 표 나게 적은데 혹 그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연대 진급 담당자에게 약을 먹이지 않아 그럴 거라고 했다.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렇지 계속 진급자가 적으면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그냥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약을 어떻게 먹여야 하느냐고 묻자 한심한 표정을 짓더니 담당자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돈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은밀하게 주되 병장은 3천 원, 상병은 2천 원을 주라고 했다. 그러면 부탁한 상병과 병장 대상자는 물론 일병 대상자까지 탈락하지 않고 모두 승진될 거라고 했다.

 다음 승진 인사 때 승진 대상자들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난감했다. 그런데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진급심사 대상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얼마를 주면 진급이 되겠느냐고 진급 대상자들이 은밀히 찾아와 묻는 것이었다. 돈을 주머니에 찔러주기까지 하는 병사도 있었지만 진급을 시켜주면 봉급을 타서 주겠다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첫째 달을 무사히 넘겼다. 우리 중대에 진급자가 뒤떨어지지 않게 나오자 중대장은 의미 있는 웃음을 웃으며 수고했다고 했다.

 봉급을 타면 주겠다던 진급자들이 모두 약속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진급을 하면 돈을 주겠다던 병사들이 돈을 주지 않으면 그만큼 내 돈으로 메꾸어야 했다. 약속한 돈을 왜 안 주느냐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무릅쓰고 약속한 돈을 왜 주지 않느냐고 묻자 다음 달에는 꼭 주겠다고 하고는 몇몇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른 중대 고참 서무계에게 고충을 말하자 방법을 알려 주었다. 연대 인사과에 바쳐야 하는 액수보다 돈을 더 받으라는 것이었다. 병장은 5천 원, 상병은 3천 원을, 그것도 선금으로 받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자 매월 진급 심사가 끝나면 몇 천 원의 돈이 수중에 남았다. 그 돈으로 행정비품을 사고 연대를 들락거릴 때 필요한 라면 값이나 소주 값으로 쓸 수 있었다.

 서무계 일 가운데 제일 어려운 일은 봉급 정산이었다. 정산 서류는 복잡했고 단 1원이라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매월 일정한 날 연대 인사과 경리계로 가서 정산서류를 확인받아야 했다. 정산하는 날은 각 중대 서무계들이 같이 연대로 들어갔다. 연대 본부까지는 두어 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지만 연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가벼웠다. 정산을 끝낸 다음 가게에 들러 라면 안주에 소주를 마시며 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봉급 정산은 오전 중에 끝냈지만 가게에서 노닥거리며 놀다가 날이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부대를 향하곤 했다.

 부대에 들어가려면 민간인 통제선을 통과해야 했다. 민통선 초소 근무자들은 늘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민통선 출입 통제 마감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탈영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민통선에 도착하는 시간은 언제나 민통선 출입 통제 시간 직전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초소 선임하사는 매번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기다렸다. 민통선에 도착하면 불콰한 얼굴로 초소로 들어가 선임하사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벽을 짚고 일제히 엎드리곤 했다. 몽둥이로 엉덩짝을 몇 대씩 때리면서 선임하사는 ‘언제까지 이럴 거냐’며 늘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무도 일찍 민통선을 넘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주 맛과 라면 맛, 왁자하게 떠드는 재미를 빳다 몇 대와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엉덩짝을 몇 대씩 맞고 달빛을 받으며 거리낄 것 없이 활개를 치며 얼큰한 술기운으로 드넓은 신작로 길을 걷는 기분은 그만이었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연대 인사과 병사들 욕을 하기도 하며 그렇게 두어 시간을 걸어 중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변은 산과 들판 뿐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참 상병들은 말년휴가를 갈 때 누구나 병장 계급장을 달고 휴가 가기를 원했다. 말년병이 상병 계급장을 달고 휴가를 가는 것은 아주 챙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휴가증에 병장이라고 기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대 인사과 담당자에게 돈 2천 원을 찔러주면 해결이 되었다.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누구나 휴가증에 병장으로 기재되기만 하면 그 돈을 내고 병장 휴가증 받기를 원했다. 연대 인사과에서 진급이나 휴가 담당 병사는 제대할 때 한 재산 만들어 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렇게 살아서 어쩌려고 그러나 한심한 생각이 들곤 했지만 생각뿐, 그들이 치부를 하도록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몇 달을 이렇게 타협하며 지내다 이러다가는 내 인생 망치겠다는 생각에 많은 번민을 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훈련소 시절 내무반장이 외출 갈 때 뇌물을 받치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대장들과 다투기까지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때부터 몇 달이나 지났다고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진급을 위한 뇌물을 연대 인사 담당자에게 바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조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진급이나 휴가 서열명부 작성 업무를 너에게 맡겼으면 싶은데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고 말고요. 진짜 그래도 돼요?”

 “그래. 앞으로 나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너에게 전권을 줄 테니까 니가 알아서 다 해라. 대신 문제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조수는 아주 좋아했다. 그 때부터 아주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조수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조수 또한 알려주지도 않았다. 아무런 문제나 잡음 없이 처리하는 조수가 대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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