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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11. 2019

그해 겨울은 추웠다

 십일월 초인가 휴가를 끝내고 버스에서 내린 김화는 이미 한겨울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귀대하는 추운 마음이 차가운 날씨와 겹쳐 더욱 추웠을 것이다. 전방의 겨울밤 추위는 견디기 어려웠다. 남대천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 낮에는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밤이 되면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한기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무반 마룻바닥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막무가내로 치고 올라왔다. 그 추운 날씨에도 행정반에는 난로조차 설치되지 않았다. 상급부대에서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난로를 설치하지는 않았는지 살피기 위해 검열을 나왔다.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전방부대 우리 행정반이 그 직격탄을 제일 먼저 맞은 것 같았다. 전방부대는 페치카가 설치되고 철책선 경계부대 내무반은 온돌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춥지는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불기 하나 없는 우리 행정반 사무실과 내무반은 차가운 냉기가 밤마다 뼈마디를 후벼 팠다. 밤이면 남대천 바람소리에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우리 행정반은 불기 하나 없이 지내야 했지만 중대장 방과 인사계 방을 춥게 할 수는 없었다. 이른 아침과 저녁이면 중대장 방과 인사계 방의 온돌을 달구기 위해 뜨뜻하게 불을 지펴야 했다. 불을 지필 땔나무는 당연히 우리 졸병들 몫이었다. 매일 나무를 하느라 우리 졸병들은 산에서 또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인사계 방을 뜨뜻하게 데우기 위해 불을 때는 시간은 그래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따뜻한 불에 몸을 녹이며 온갖 상념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 때기가 끝나면 또 추위에 떨어야 했다. 

 중대장 방은 언감 생심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침 식사를 끝내면 추운 몸을 잠시라도 녹이기 위해 인사계 방 한 구석에 엉덩이를 걸치곤 했다. 고참들은 하루 종일 인사계 방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인사계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전기 곤로에 소시지와 햄을 구워 먹기도 하고 건빵을 식용유에 튀겨 먹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지만 졸병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물론 가끔 인사계가 아주 기분이 좋을 때는 얼마간 인사계방에 엉덩이를 걸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 잠깐일 뿐이었다. 인사계와 고참들의 눈초리가 항상 따뜻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매트리스 두 장을 깔고 모포 일고여덟 장씩을 덮고 잤다. 여기저기 덕지덕지 기운 낡을 대로 낡은 모포는 무겁기만 할 뿐 추위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옷을 있는 대로 끼워 입고 자야 했다. 내복 위에 깔깔이를 입고 야전 점퍼에 솜바지와 스키 파커를 또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장갑까지 끼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잠자리에 들면 옷과 담요의 무게로 몸을 제대로 뒤집을 수도 없었다. 행정업무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내무반에서 배를 바닥에 깔고 보아야 했다. 손이 시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일을 하긴 해야 했다. 일이 없을 때는 바깥으로 나가 해가 잘 드는 곳에서 종일 해바라기를 했다. 겨울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추위를 견기기 힘들 때는 연대 본부에 일을 보러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연대에서 일을 대충 끝내고 나면 가게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었고 뜨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연대에 들어갈 일을 만들어야 했다. 밤늦은 시간 민통선 위병소에서 엉덩짝을 몇 대씩 맞아야 했고 밤늦게 들어온다고 인사계와 고참들로 부터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연대에 들어갈 일은 꾸준히 만들어 냈다. 

 겨울 빨래는 가히 고문 수준이었다. 물은 차가웠고 손은 떨어져 나갈 듯 시렸다. 비누가 풀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찬 물에 손이 마비가 되고 나면 손이 심하게 화끈거리기만 할 뿐 시린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고참들이 졸병들에게 빨래를 시키는 일은 없었다. 빨래를 하면서 그 차가운 물에 가끔 머리를 감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날은 사과 한 개가 특식으로 나왔다. 그리 크지 않은 사과였지만 마음 써주는 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날 밤에는 중대장과 함께 철책선 근무를 하는 병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철책선 초소를 돌았다. 눈길이 굉장히 미끄러웠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고생하는 병사들을 중대장은 다독여 주었고 위문품으로 받은 과자와 사탕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소는 몹시 추웠는데도 병사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하나같이 견딜만하다고 했다. 강추위 속에서 하루도 빼지 않고 1년 내 밤샘 근무를 하는 병사들을 직접 대하니 내무반에서 두터운 모포를 덮고 자면서도 춥다고 불평했던 자신이 사치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3월이 되자 난로를 설치해도 좋다는 전통이 떨어졌다. 왜 갑자기 방침이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행정반에 난로를 설치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 좋았다. 석탄 난로가 아닌 나무를 때는 난로였다. 매일 나무를 하러 더 자주 산으로 가야 했고 땔나무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뜨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행복감으로 힘이 들어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우리 행정반이 주둔하고 있던 곳은 6.25 때 철의 삼각지였던 김화읍 한가운데였다. 당시에 살아남은 나무는 거의 없을 터였다. 쌍방의 포격으로 산의 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자랐을 잡목만 무성했다. 막사 가까운 평지의 지뢰지대에는 나무가 무성했지만 그 나무를 자르기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무를 하기 위해서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인근 중대와 소대, 대대본부까지 매일 나무를 잘라냈기 때문에 땔나무로 쓸만한 나무는 거의 없어 나무뿌리까지 캐어 불을 때야 했다. 난로를 설치하면서 한 밤중 상황근무는 아주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따스한 난로 가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거나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라면은 얼마든지 있었고 고추장까지 풀어 끓여먹는 호사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크게 힘들지만은 않게 되었다. 특별히 일이 없으니 시간이 많았고 무료한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럴 때 책만 한 것이 없지만 책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후방에서 샘터 잡지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를 가끔 보내 주곤 했는데 몇 달씩 전에 발행된 것, 심지어는 몇 년 전에 발행된 것도 있었다. 그런 책도 보내주는 것이 고맙기만 했다. 좋은 글귀는 줄을 쳐가며 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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