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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16. 2019

병사와 편지

병사들은 늘 편지에 목말랐다. 문서수발 병사가 내무반에 들어오면 우르르 몰려가 자신에게 온 편지가 있는지 확인을 하곤 하지만 대부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서야 했다.  왜 내 편지는 안 가지고 왔냐고,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와야지 하며 문서수발병에게 생떼를 쓰는 고참들도 있었다. 부모형제나 친구들로부터 오는 편지가 반갑다 해도 병사들에게는 애인한테서 오는 편지에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애인이 없는 병사는 애인을 만들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신병이 전입해 오면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이쁜 동생이 있다고 하면 그날부터 대접이 달라졌다.

 할머니한테 편지를 썼다. 일생 동안 누구로부터도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할머니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이쁜 손자였다. 형님 밑으로 줄줄이 여섯을 잃고 얻은 손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학 때 집에 가면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챙겨주지 못해 늘 안달이었다. 다른 형제들과 표 나게 차별을 두는 할머니가 싫어 맛있는 걸 챙겨줄 때마다 짜증을 내곤 했지만 그 짜증을 늘 웃음으로 받아주던 할머니였다.

 휴가를 얻어 집에 가자 할머니는 편지 이야기를 하며 눈물부터 글썽이셨다.

 “내가 살면서 편지 받아볼 일이 없었는데 니가 내한테 편지를 다 보냈구나. 니 형도 삼촌도 군대에서 내한테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는데 니가 내한테 편지를 보냈구나. 고맙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편지를 기다린다는 생각을 형님이나 삼촌은 하지 못하셨나 보다.

 병사가 손쉽게 애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펜팔이었다. 잡지나 노래책 같은 데에는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의 주소가 늘 실려 있었다. 병사들은 펜팔 란의 주소로 편지를 쓰고 또 쓰고 했지만 답장받기는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펜팔 답장을 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누군가 내가 써 준 편지에 답장을 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는지 편지를 좀 써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책 속의 좋은 문장들을 뽑고 뽑아서 펜팔 텍스트를 만들었다. 중대원들 거의가 똑같은 내용으로 펜팔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온 편지에 또 답장을 써달라는 부탁까지 하기는 염치가 없었는지 병사들은 끙끙 앓으며 스스로 답장을 쓰느라 골몰했다. 덕분에 책 읽는 병사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조수는 늘 여자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수시로 답장을 받았다.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내게도 한 사람 소개해주면 안 되겠냐고 하자 정말이냐며 아주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며 한 여성의 주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낸 편지에 덜컥 답장이 왔다. 편지 오가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심심파적으로 한 일이었는데 상대는 상당한 기대를 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가씨가 덜컥 면회를 왔다. 철책근무를 끝내고 페바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조수와 나를 동시에 만나겠다는 아가씨가 면회 왔다는 전화를 위병소로부터 받고 몹시 당혹스러웠다. 조수와 함께 외박증을 끊고 위병소로 나가 만난 아가씨는 상상 속의 여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박 2일 동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온 반가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내민 꾸러미에는 몇 겹이나 꼭꼭 싼 양담배가 들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검문소에서 헌병이 검문을 할 때마다 그걸 들킬까 간이 오그라들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조수와 셋이서 여관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조수 녀석이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둘이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잠든 조수를 가운데 두고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이내 사라지고 길기만 할 것 같던 밤도 금세 밝아오고 있었다. 감성이 참 깊은 것 같다고, 어찌 그리 해박하냐고 추어주는 말에 더 신이 나 시간이 빨리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제대가 가까워 오면서 이런 만남은 제대를 하면 통상 끝나더라는 편지를 그녀가 보내왔다. 그대로 끝내면 아주 나쁜 놈이 될 것 같아 편지를 계속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면회를 올 사람이 없는데도 일요일만 되면 면회가 기다려졌다. 말쑥한 군복으로 갈아입고 면회를 나가는 병사들이 부럽기만 했다. 일요일 오전 위병소에 나타나는 이쁜 아가씨들 모습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단에서 음어 합숙 훈련을 하고 있을 때 형님 내외분이 면회를 왔다. 형님을 만난 반가움보다 밖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점심을 먹고 얼마간의 용돈을 쥐어주고 형님 내외분이 떠나자 막상 자그마한 시골마을에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럴듯한 술집으로 무작정 들어가 작은 방에서 아가씨와 둘이서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 한 되에 1,000원이라는 아가씨 말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군에 입대하기 전 무교동이나 대구 향촌동에서도 막걸리 한 되는 70원이면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산골 마을에 1,000원이라니. 주문한 막걸리 한 되만 마시고 곧장 그 집을 나왔다. 산골 마을에 술집 고객은 당연히 군인일 터였다. 군인들이 많이 찾으니까 술값이 그리 비쌀 것이었다. 장교나 하사관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들이 어떻게 이런 비싼 술집에 드나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입대 전 친구와 둘이서 맥주 집에 갔다. 대구 향촌동에서였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유흥가였지만 맥주 집은 그 집 한 집 밖에 없었다. 맥주는 그만큼 비싼 술이었다. 한참을 마시다 아무래도 돈이 많이 모자랄 거 같아 집에 가서 돈을 가지고 오겠다며 친구에게 호기를 부렸다. 등록금으로 받은 돈이 책상 서랍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서 그 돈을 다 들고 나왔다. 사촌 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던 집이었다. 아이들 공부도 도와주면서 보살펴달라는 작은 어머님 부탁으로 재수할 때부터 내가 대구에 가면 머물던 집이었다. 천문학적 금액이었던 등록금을 하룻밤 술값으로 다 날리고 말았다. 여자가 있는 술집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등록금이 하룻밤 술값밖에 되지 않은지는 따지지도 않았다. 순진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버지께 등록금을 또 달라고 하면 준 등록금은 어디에 썼느냐고 물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등록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겁하지만 사촌 여동생을 아버지께 보냈다. 어떻게든 재주껏 둘러대고 등록금을 받아오라는 말과 함께. 사촌 여동생은 무슨 수를 썼는지 등록금을 타 왔다. 그 친구와 나 사이에 등록금 사건은 전설이 되었다. 지금도 호기롭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웃곤 한다.

 철책에서 근무하던 어느 여름날 가슴 뛰는 편지가 왔다. 편지를 받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입대를 하면서 재수를 포기하고 유학을 가겠다면서  헤어졌던 그녀의 편지였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게 될 5년 후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녀였다. 주소를 알 길 없어 편지를 쓸 수는 없었지만 늘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녀였다. 너무나 그리운 생각에 혹 편지가 전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며 그녀의 집으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온 것이었다. 외국 생활이나 유학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낸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안부만 전하고 있었다. 절절한 그리움이나 만남을 기다린다는 간절함도 없었다. 그런데도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가슴 두근거리고 벅차기만 했다. 이후 그녀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가끔 보내오는 답장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다가 정기휴가를 받자마자 곧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공무원이 되어 시골 면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면사무소 앞 식당으로 달려온 그녀는 너무 흥분이 되어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며 내가 밥을 먹는 앞에서 계속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오후 휴가를 내고 나왔다는 그녀와 근처 유원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녀가 안내해 주는 여관에서 혼자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잠시라도 여관에 들르리라 기대를 했지만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작정 달려간 터라 수중에는 집에 갈 차비도 밥값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존심을 죽이고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출근시간에 늦을 것 같아 들르지 못했다며 여관에서 돈을 좀 빌려서 가라고 했다. 여관은 아는 집이라고 했다. 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했지만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뜸했다. 힘들게 군대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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