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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Oct 08. 2019

말년 병장

말년 병장이라고 해도 입맛이 없어 밥 먹기가 힘들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졸병 때는 그렇게 맛있던 군대 밥이 어떻게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맛으로 변할 수가 있는지 참 불가사의였다. 졸병 때 고참들이 밥을 남겨주던 일이 이해가 되었다. 매 끼니마다 밥반찬이라고는 된장국 말고는 김치밖에 주지 않던 것에서 일식 삼찬으로 발전을 했는데도 입맛은 영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삼 찬이란 것이 배추로 끓인 된장국에 배추김치, 배추를 삶아 무친 반찬 이런 식이었으니 입맛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기는 난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대 생활 마지막 해 봄이 되자 어김없이 산에 텐트를 치고 중대원들은 작업장으로 이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장으로부터 작업장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하여 부리나케 작업장으로 들어갔더니 생각지도 않던 특별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더덕 채취 조장. 전 군에 하나밖에 없을 직책이었다. 매일 각 소대원 한 명씩을 차출하여 인근 산에 올라가 더덕을 캐오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야생 더덕을 본 적도 없었지만 어쨌든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차출되는 소대원들에게 더덕 캐는 일은 더할 수 없는 꿈의 보직일 터였다. 아침에 더덕을 캐러 갈 병사를 차출하기 위해 소대 텐트를 돌면 병사들은 내게 눈을 맞추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매일 소대에서 한 명씩을 지원받아 취사장에서 쌀과 부식을 타서 산으로 향했다. 더덕은 생각만큼 많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약초를 캐는 민간인들이 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고 있을 때였으니 더덕이 쉽게 눈에 띄겠는가. 그래도 하루 종일 산을 뒤지고 다니노라면 어느 정도의 더덕을 캘 수는 있었다. 간혹 팔뚝만 한 더덕을 캘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고 기껏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더덕이 대부분이었다. 속에 물이 잔뜩 차 있는 대물 더덕을 어쩌다 캐면 조원들은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머니 속으로 슬며시 쑤셔 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애써 모른 체했다. 

 처음에는 더덕이 어떤 곳에서 자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더덕이 자라는 곳을 금방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곧 산의 지형만 보고도 더덕이 있을만한 곳을 쉽게 알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햇살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산록에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은 교목이 드문드문 서 있고 두텁게 낙엽이 쌓여 있는 곳이면 더덕이 몇 뿌리는 자라고 있었다. 더덕은 군락을 이루고 자라기 때문에 한 뿌리만 발견하면 여러 뿌리를 캘 수 있었다. 더덕 군락지에서는 진한 더덕 향을 내뿜어 찾기가 더욱 쉬웠다.

 봄에 시작한 더덕 캐기는 한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산에는 뱀, 특히 살모사 같은 독사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뱀을 잘 보지 못하는데 내 눈에는 뱀이 유달리 잘 띄었다. 뱀을 싫어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다 뱀이 눈에 띄면 같이 간 병사들이 재빨리 뱀을 포획하여 통일화 끈으로 모가지를 묶어 막대기에 매달고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산 아래 마을, 가게에서는 뱀은 언제든 대환영이었다. 살모사 한 마리를 잡아가면 라면과 소주를 양 껏은 아니지만 적당히 먹고 마실 수 있게는 주었다. 더덕은 그다음 날 또 캐면 될 일이었다. 

 주말 없이 계속되는 작업도 가끔 일요일에 휴식을 취할 때가 있었다. 병사들은 밀린 빨래를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짓궂은 녀석들은 어디서 잡았는지 꿈틀거리는 뱀을 목에 걸기도 하고 품속에 넣고 다니면서 심약한 병사들을 놀라게 하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 텐트에 들어 누워 책을 읽다가 텐트 속으로 뱀을 집어던져 넣어 혼비백산 도망을 가기도 했고 뱀을 목에 걸어보라며 쫓아오는 녀석을 피해 텐트촌을 몇 바퀴씩이나 돌기도 했다. 녀석에게는 장난이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다. 그렇다고 장난을 하는 녀석을 혼낼 수도 없었다.

 더덕을 캐기 위해 산속을 헤매면서도 산속에 난 차도는 애써 피해야 했다. 대대장이나 연대장 차에 재수 없게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칡 같은 넝쿨식물들이 온 산을 휘감아 산속을 헤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몇 달 동안 캔 더덕이 라면 상자로 가득가득 몇 상자나 되는 것을 본 중대장은 흡족한 웃음을 웃으며 포장을 잘하라고 했다. 모두 엄지손가락이나 그 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고만고만한 굵기의 더덕이었지만 야생 더덕 향은 좁은 중대장실을 가득 메웠다. 라면상자에 넣어 깨끗이 포장한 더덕을 중대장은 어디론가 가지고 갔다. 대대장과 연대장, 사단장한테 갔을 것이라고 모두 쑥덕댔다. 

 우리 중대에서 하사관 지원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자 인사계는 아주 안달이 났다. 하사관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그렇게 좋지는 않을 때였기 때문에 장기 복무를 원하는 병사들은 아주 드물었다. 인사계는 장기복무 지원자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나를 들들 볶았지만 늘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그러던 중 국립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군단 하교대 출신 병장이 하사관 지원을 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주 성실하고 착한 모범적인 병사였다. 아무래도 말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군단 하교대 출신들은 훈련이 끝나면 바로 병장으로 진급을 했기 때문에 자대에 배치를 받게 되면 아주 어려움이 컸다. 이들이 전입하면 고참들은  전입신고 교육을 고참 일병이나 상병에게  맡겼다. 전입신고 교육을 받을 때 이들은 새까만 일병이나 상병에게 꼼짝없이 수모를 당해야 했다. 졸병들은 선임하사나 소대장이 보는 앞에서는 이들을 병장으로 예우를 하지만 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고 구타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병장 계급을 달고 일병이나 상병들에게 시달리고 수모를 받아야 하는 이들의 고충은 컸을 것이다.

 조용히 그를 불러서 장기 복무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실이라고 했다. 이미 인사계에게 그 뜻을 전달까지 했다고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님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어찌어찌하여 대학에 입학은 할 수 있었지만 제대를 해도 복학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누님도 누님이지만 매형 보기가 미안해 복학할 염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장기 복무를 지원했다고 했다. 누님이나 매형이 결코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당장은 마음 편할지 모르지만 분명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라며 그를 달랬다. 자신도 분명 후회할 거라고 했다. 누님이나 매형도 이 사실을 알면 많이 실망할 거라고도 했다. 그러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장기복무 지원을 취소하라고 설득했다. 며칠을 번민하던 그는 장기 복무 지원을 취소했다. 

 인사계는 내가 그를 설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보고 대신 말뚝을 박으라며 노발대발했다. 억지로 설득해서라도 장기복무를 지원하게 해야 할 놈이 장기복무를 하겠다는 놈조차도 못하게 방해를 하다니 난리가  아니었다. 며칠을 시달리기는 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젊은이를 구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아주 뿌듯했다.

 중대에 피부병이 돌기 시작했다.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이 한 명, 두 명 몸을 긁적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중대원 거의 전원이 피부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타구니가 가렵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 끝이 조금씩 곪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별 걱정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는데 곪은 부위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동기 한 녀석에게 곪은 부위를 보여주며 걱정을 했더니 빨리 의무대에 가라고 했다. 

 의무대 군의관은 성병이라고 했다. 

 “성관계도 하지 않았는데 성병에 걸릴 수 있습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임마. 성관계가 없었는데 어떻게 성병에 걸리냐. 당연히 성관계를 했겠지.”

 “아닙니다. 성관계는 고사하고 여자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요.”

 “이 자식이 자꾸 거짓말하고 있어. 약국에 가서 주사약이나 사 가지고 와. 주사는 맞혀 줄 테니까 새끼야.”

 이런 돌팔이 새끼 같으니라고 속으로 욕을 하며 읍내 약국에서 항생제 주사약을 사 와 매일 그 돌팔이에게 주사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곪은 부위는 금방 나았지만 몸은 여전히 가려웠다. 급기야는 온몸 여기저기에 발진이 돋기 시작했다. 피부병이 심한 중대원들은 유황을 물에 개어 발진 부위에 바르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매일 산속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온몸에 유황을 발랐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제대를 하고도 몇 달간이나 계속 병원을 다녀서야 간신히 나을 수 있었다. 

 고참들이 다 제대를 하고 나 위에는 고참이 한 명만 남았다. 행정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졸병을 괴롭히는 병사도, 문제 병사도 없었다. 한 명 남은 고참이 제대를 2,3일 앞두고 자기 동기들과 막걸리를 마시다 동기 한 명과 싸움이 붙었다. 말다툼으로 시작된 싸움이 주먹다짐으로 번지면서 중대장까지 알게 되었고 중대장은 두 사람에게 막사 앞마당을 파라는 벌을 내렸다. 가로 2m, 세로 1m, 깊이 50cm의 땅을 두 시간 안에 파라고 했다. 중대 막사 앞 땅은 삽은 고사하고 곡괭이조차 탁탁 튈 정도로 단단해 50cm 깊이가 아니라 단 10cm 깊이도 파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땅을 파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돕지 말라는 중대장의 엄명에 모두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 말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는 모습이 안쓰러워 웃통을 벗어젖히고 곡괭이를 들었다. 둘이서 한 시간을 넘게 팠지만 10cm 깊이도 채 파지 못하고 있는데 중대장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중대장은 내게도 똑같은 벌칙을 내렸다. 한 30분쯤 힘들게 땅을 파자 중대장은 중대장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고생이 많았다면서 우리에게 막걸리를 잔 가득씩 따라주었다.

 행정반 제일 고참이 되었다 하여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소대 졸병들은 일상적으로 장난을 걸었고 여전히 ‘똥터루’라고 놀려댔다. 스웨덴 그룹 아바가 ‘워털루’ 노래를 유행시킬 때였다. 얼굴을 수염이 뒤덮었다고 똥털이라고 부르다가 워털루 가락에 맞추어 ‘똥터루 똥터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군 동기 녀석들은 너무 졸병들을 풀어주니까 버릇없이 구는 거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다 친구 사이일 텐데 너무 군기 잡지 말자며 녀석들을 달래야 했다. 

 행정반 막내는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병사였다. 호적이 잘못되어 일찍 입대를 했다고 했다. 행정반 고참들이 돌봐주기보다는 괴롭히기 일쑤여서 그 모습이 불쌍하고 애처로워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다독여 주었더니 나를 아주 잘 따랐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있을 때 휴가를 가게 된 그는 연대에서 휴가신고를 마치고 집으로 가지 않고 부대로 다시 돌아와 위병소에서 전화를 했다. 위병소로 달려가 그를 만났다.

 “집에 가지 않고 왜 왔어?”

 “이제 집에 가면 강 병장님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 병장님 뵙고 가려고 잠시 들렀습니다.”

 그러더니 편지봉투를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이게 뭐지?”

 “휴가비에서 차비만 빼고 다 넣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마음으로는 무엇이든지 다 드리고 싶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콧등이 시큰했다. 받지 않아야 하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대하는 날 전 중대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와 중대 막사 앞에서 위병소까지 도열해 박수로 전송을 하며 축하를 해 주었다. 한 사람씩 굳게 손을 잡으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콧등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안동 36사단을 거쳐 제대증을 받고 집에 온 날 밤에 부대에 남아있는 중대원들에게 밤을 새워 편지를 썼다. 100명이 좀 넘었다.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편지 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34개월의 군 생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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