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석 Oct 04. 2019

때로는 고된 훈련도

 페바 부대에서는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훈련도 했다. 대대 ATT나 연대 RCT 같은 훈련을 할 때는 검열관이 나와 측정을 하고 평가도 했다. 이런 훈련이 있을 때면 대대 보급관이나 작전장교는 서울을 들락거리기 바쁘다고 했다. 훈련 준비에 바쁠 사람들이 서울에는 왜 가느냐고 대대 고참들한테 물을라치면 

 “야 그걸 몰라서 묻냐? 측정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대대장이 승진을 할 거 아니냐.” 

 “장교들 서울 가는 거 하고 대대장 승진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야 너 순진한 거냐 아니면 세상을 모르는 거냐? 검열관한테 뭐라도 바쳐야 할 거 아니냐?”

 “검열관한테 바쳐요? 뭘요?”

 “뭐긴 뭐냐, 양담배, 양주 뭐 그런 거지.”

 “양담배는 피우는 것도 불법인데 그걸 검열관한테 사다 준다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고참들은 한심한 듯 쳐다보며 대꾸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군 검열 점수가 뇌물 내용하고 관계가 있다는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 나라 국방은 어떻게 되는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육군 졸병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아 그저 모른 체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페바 부대로 이동한 가을에 대규모 훈련이 있었다. 이번 훈련에 있을 장거리 야간 행군에는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모두가 참가해야 한다고 했다. 행군 일주일 전쯤 야간 행군 훈련에 대비한 예비훈련부터 했다. 수통에 물부터 가득 채우고 군장을 꾸려 어두워질 무렵 부대를 출발하여 새벽이 되어서야 부대로 돌아왔다. 예비훈련이었지만 40Km에 이르는 장거리 행군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힘이 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정도 행군이라면 80Km 행군도 거뜬할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80Km 야간 행군 훈련을 떠났다. 예비 행군 때 수통에 물 대신 소주나 막걸리를 채우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물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비 행군 때 술을 수통에 채워 갔다가 아주 혼이 났다고 했다.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다고도 했다. 해가 지기도 한참 전에 연병장을 출발하자 사단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군악대 나팔소리는 다리를 가볍게 했고 어깨를 으쓱거리게 했다. 

 행군을 시작하고부터 인솔 장교의 눈치를 보면서도 잡담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며 기분 좋게 걷던 병사들이 점점 시간이 지나자 입도 뻥긋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에만 몰두했다. 불빛 하나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길은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와 소총과 장비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뿐 적막하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진작 수통 물은 바닥이 드러나고 목이 말라 입은 바짝바짝 타는데도 물을 뜨러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시냇물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도 금방이면 달려가 물을 떠 올 수 있겠다 싶은데도 그 가까운 거리가 10 리는 되는 것 같아 도저히 물을 뜨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10분간 휴식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물 뜰 생각보다 배낭을 내팽개치고 땅바닥에 벌렁 드러눕기 바빴다. 워커를 벗고 발을 쉬게 해주어야겠다 싶으면서도 워커를 벗을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그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앞사람을 따라 의식도 없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부상병을 이송하는 트럭이 아주 느린 속도로 지나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들렸다. 무조건 저 트럭에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트럭을 놓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해 트럭 꽁무니에 무작정 매달렸다. 트럭에 매달리기 무섭게 누군가가 다리를 낚아채고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나도 모르게 발로 그 손을 걷어차고는 재빠르게 트럭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를 지났는지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깨 몽롱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어떻게 된 노릇인지 거기는 트럭 안이 아니라 우리 중대 행정반 텐트 안이었다. 분명 트럭을 탄 기억만 있는데 숙영지 텐트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숙영지에 언제 도착을 했는지 텐트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짧은 가을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날 밤을 숙영지에서 자고 다음날 훈련을 떠나려고 하는데 인사계가 사무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사무실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훈련다운 훈련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고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힘든 유격훈련을 1년에 한 번은 받아야 했다. 유격장에서는 고참, 졸병 구분 없이 모두 계급장을 떼고 훈련을 받았지만 훈련이 끝나고 텐트로 돌아오면 졸병은 여전히 고달팠다. 계급장을 떼었다고 해도 밥을 타 오고 식기를 닦고 청소를 하는 것 등은 모두 졸병들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유격훈련은 PT체조로 시작해 PT체조로 끝난다. PT체조로 힘이 완전히 빠져 녹초가 되고 팔은 덜덜 떨리는데 이 떨리는 팔로 어떻게 줄을 잡고 계곡을 건너고 바위를 올라가라는 말인가? 떨리는 팔로 까마득한 계곡 사이를 외줄을 타고 건널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무서움을 가장 크게 느낀다는 10m 높이 훈련에는 별 무서움을 몰랐는데 까마득한 높이의 계곡은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건너나 겁에 질려 있는데 건널 자신이 없는 올빼미는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창피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얼른 앞으로 나갔다. 10여 명이 넘는 겁 많은 올빼미들은 다른 올빼미들이 유격을 다 끝낼 때까지 PT체조로 더욱 녹초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암벽 타기는 아주 재미있었다. 로프를 몸에 묶고 수 십 미터 암벽을 올라갔다가 점프를 하여 그 절벽을 다시 내려오는 훈련이었다. 

 1주일을 받아야 하는 유격훈련을 한 번도 끝까지 다 받아본 적이 없다. 늘 행정반에 일이 생겼다고 중간에 복귀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동료 병사들은 화생방 훈련 같은 힘든 것을 하지 않고 돌아가는 나를 몹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지만 힘든 유격훈련 경험을 놓치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부른 자의 투정이라고 욕먹을 게 분명했지만 말이다.

 통신병 조수가 나가야 하는 훈련을 대신 나갔다가 아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모든 지시가 음어로 떨어지고 음어로 답해야 하는 훈련이라 통신병이나 조수가 음어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대신 나가야 한다고 해서 나간 훈련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고 호기심도 들어 기쁜 마음으로 따라나섰는데 훈련 현장에 도착한 통신병 사수가 사색이 되어 음어판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대대장 차를 타고 부대로 다시 돌아가 음어판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어 당연히 초기 훈련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남은 훈련만을 소화했다.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중대장은 훈련이 끝낸 우리 둘에게 팬티바람으로 산등성이에 집합을 하라고 했다. 벌건 대낮에 산등성이에서 팬티만 걸치고 중대장 앞에서 그것도 단 둘이서만 시키는 대로 구호를 외치며 PT체조를 하고 기합을 받는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기합을 받으면서도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벌건 대낮에 단 둘이서 산등성이에서 벌거벗고 쪼그려 뛰기를 하고  푸시업을 하고 소리를 쳐가며 PT체조를 하고 있으니 어찌 안 우스웠겠는가. 그러나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진땀을 빠직빠직 흘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느라 정말 혼이 났다. 햇살 화창한 오월이었는데도 차가운 바람이 뼈를 파고들자 춥기는 어찌 그리 춥든지.

 팬티바람 기합은 겨울뿐 아니라 한여름에도 자주 받았다. 더운 한여름 밤에  드넓은 연병장에 벌거벗고 서있으면 시원하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팬티만 걸치고 연병장에서 양팔 간격으로 서서 다리를 벌리고 팔과 손가락까지 펼치고 서 있는데 모기란 놈이 그냥 지나가겠는가? 온몸에 모기가 달라붙어 피를 빨아대는데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팔과 다리 근육 힘만으로 모기침을 막아야 했다. 

 전방 모기는 지독했다. 옷을 뚫는 것은 기본이고 통일화까지 뚫었으니 말이다. 모기가 들끓는 여름밤에 잠을 이루기는 정말 힘들었다. 모포를 뒤집어쓰면 모기침은 막을 수 있었지만 더위를 견딜 수 없었고 모포를 차 버리면 모기가 떼거리로 몰려들어 살을 뜯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포를 뒤집어썼다가 찼다가를 반복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막사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쐬다 내무반에 들어가 간신히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잠이 들었다 싶으면 상황 근무를 서라고 깨우니 잠을 제대로 잘 수나 있었겠는가.

 전 중대원이 총동원되어 벙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벙커를 만드는 고된 작업이었다. 시멘트가 굳기 전에 작업을 다 끝내야 했기 때문에 작업을 쉴 수가 없어 벙커 작업을 할 때는 행정반까지 다 동원되어야 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작업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낼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나기 무섭게 중대장은 신속히 부대로 철수하여 완전군장을 꾸리고 즉시 OP로 출동하라고 했다. 판문점에서 작업을 하던 미군이 북한군에 의해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되어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며 전원 OP로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즉시 부대로 돌아와 군장을 꾸리고 전 중대원이 막사 앞에 정렬을 하자  실탄이 장전된 탄창과 전투 식량 등 전투에 필요한 일체의 물품을 지급해 주었다. 전 중대원은 대오를 갖추고 곧바로 714 고지 OP를 향했다. 

 우리 중대는 81mm 박격포와 경기관총으로 무장하는 중화기 중대였으므로 박격포 소대인 3소대 병사들은 배낭과 총 외에 포 다리와 포판, 포열 등 각자가 10Kg이 훨씬 넘는 장비를 어깨나 등에 짊어지고 산을 올라가야 했다. 경기관총 또한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총을 멘 채 완전군장으로 꾸린 배낭을 걸머지고 여기에 경기관총이나 포판 등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대원들은 이것들을 짊어지고 OP에 투입되는 훈련을 수시로 했기 때문인지 크게 힘들어하지도 않는데 배낭과 총만 멘 행정반원들이 오히려 힘들어 쩔쩔맸다. 

 714 고지에 올라 텐트를 치기 무섭게 곧바로 진지에 투입되었다. 105mm포와 155mm포가 산 밑에 배치되고 후방 지원 사단에서 자주포 등 각종 포와 전차를 끌고 와 후방에 배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전차 굉음이 멀리 산 아래에서 끊임없이 들렸다. 81mm 소대는 박격포탄을 포탄 상자에서 꺼내어 언제라도 장전할 수 있게 준비를 마쳤고 경기관총은 실탄을 장전하고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철책을 지키고 있는 GOP 부대는 페바 부대 뒤로 철수를 하고 페바 부대인 우리가 현 진지를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고 했다. 밀려드는 적을 격퇴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고 했다. 진지에 투입되자 각자가 공격해야 할 지점을 알려 주었다. 적군이 산을 타고 올라올 때 그 적군을 향하여 사격을 해야 하는데 다른 곳은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맡은 구역만 어떻게든 막으라고 했다.

 긴박하게 돌아갈 것 같은 상황이 밤이 깊어져도 변화가 없었고 사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마음이 초조한 만큼 시간은 느리기만 했다. 밤 12시 가까이 되어도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고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초조해졌지만 안도감은 그에 비례해 커져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2시가 넘고 1시 가까이 되자 각자 텐트에서 조용히 취침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때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병사들은 누구랄 거 없이 부둥켜안고 기뻐 날뛰었다. 환희심이 온몸으로 전율이 되어 파고들었다. 밤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만세를 불렀다. 삶의 희열을 만끽하며 아침식사를 마치고 기쁨에 넘쳐 철수를 했다.

 부대로 철수는 했지만 비상상태는 계속되었다. 군장은 꾸린 상태 그대로 두어야 했고 이동시에는 항상 철모를 쓰고 위장망을 입고 총을 들고 다녀야 했다. 잠잘 때도 통일화를 신고 자야 했다. 그렇게 데프곤 2 상태가 지속되다가 데프곤 3로 바뀌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제대 명령지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제대가 다소 늦춰질 거라고 했고 실제 제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2주 정도 늦어졌다.      

작가의 이전글 음어 경연대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