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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27. 2019

음어 경연대회

 정기휴가는 일 년에 15일씩 두 번이 주어졌다. 병사들의 휴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국민학교 시절 설날이나 소풍, 운동회를 기다리던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각 소대는 깨끗하고 상태가 좋은 전투복을 휴가용으로 별도로 관리했다. 휴가를 가는 병사는 그 옷 가운데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고 휴가를 갔다. 겨울에는 미제 야전 점퍼가 아주 인기였다. 군에서 보급품으로 나오는 국산 야전 점퍼는 디자인이나 재질이 아주 형편없었지만 미제 야전 점퍼는 아주 세련되고 품질이 좋았던 것이다. 매형이 군에서 입었던 야전 점퍼라며 내게 건네준 미제 야전 점퍼는 중대 공용 휴가 점퍼가 되었다. 휴가 나가는 병사마다 빌려달라고 해서 정작 나는 제대로 입어 보지도 못했다. 제대하면서도 그 야전 점퍼는 부대에 두고 나와야 했다.

 겨울철에는 휴가를 가기 전에 손을 집중 관리해야 했다. 졸병들은 하나같이 손이 터져 있었다. 아침 점호 시간이면 소대장들이 휴가를 앞둔 병사들 손에 멘소래담을 발라주며 손 관리를 시켜주기도 했다.

 첫 휴가를 나와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타하고 안 계시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는 자고 있던 나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시며 계속 머리만 쓰다듬으셨다. 집에 도착하여 이틀을 보냈을 때 급히 귀대하라는 전보가 부대에서 날라 왔다. 첫 휴가인데 밑도 끝도 없이 귀대하라니 무슨 일인가 궁금하면서도 몹시 화가 났다. 귀대를 해야 하나 깔아뭉개야 하나 미적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부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대에 들어가자 왜 벌써 왔느냐고 모두 놀라워했다. 전보를 보내긴 했지만 오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행정반 왕사수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음어 경연대회 때문이라고 했다. 사단장상이 걸린 연대 대항 음어 경연대회 날짜가 잡혔다며 연대 음어 합숙훈련 차출이 내려와 어쩔 수 없이 전보를 쳤다고 했다. 겨우 음어 경연대회 합숙을 위해 휴가 간 사람을, 그것도 첫 휴가 간 사람을 휴가 중에 부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연대 본부로 합숙훈련을 가야 했다. 아직 음어는 초보 수준이라 숫자를 말로 풀어쓰는 해역은 연습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립 또한 숫자만 빨리 쓰면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연습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 실력이 늘 리가 없었다. 한 달 가까이 합숙훈련 끝에 대회에 나갔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조립은 상당히 빨리 끝냈지만 해역은 반도 풀지 못했는데 여기저기서 끝, 끝 하며 일어나고 있었다. 해역은 문제가 유출되지 않고는 이렇게 빨리 풀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얼마간이 지난 후 연대 정보과에서 사단에 음어 합숙훈련을 들어가라는 연락이 왔다. 정보과에서는 합숙훈련 들어가도 일병 계급장을 달고 사단에 들어가면 졸병이라고 마구 부려먹을 것 같아 사단 정보처에 내 계급이 상병이라고 보고를 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상병 계급장으로 바꿔 달고 사단에 가야 했다. 사단에서 합숙훈련을 하던 중 연대 정보과에서 전화가 왔다며 전화를 바꾸어 주었는데 나도 모르게 ‘통신보안 일병 강현석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았다. 지켜보고 있던 합숙훈련 병사들이 내가 계급을 사칭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었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고맙게도 그들은 상병으로 계속 대접해 주었다. 합숙 훈련자들은 각 연대와 포대에서 1명씩 차출된 병력과 사단 사령부 병력 등 6,7명이었다. 모두가 병장과 상병들이었으니 내가 제일 졸병인 셈이었다.

 음어판을 갖다 놓고 매일 조립과 해역을 반복 연습했다. 음어를 빨리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특별히 감독을 하지도 않았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해야 했고 나름대로 빨리 푸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돌아가며 문제를 내고 시간을 재가며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단 정보장교가 놀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가끔 들렀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장교가 나가면 음어판은 던져둔 채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잡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그중 한 병사는 새로운 판으로 음어판이 바뀌자 그걸 한 시간 정도 들여다보고 나더니 음어판은 보지도 않고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음어판을 외울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고 있는데 그걸 한 시간여 만에 다 외우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병사의 음어 푸는 실력은 그렇게 출중하지는 않았다.

 조립은 숫자를 빨리 쓰는 것 외에는 빨리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해역은 연습 여하에 따라 빨리 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터득하게 되었다. 문제를 받으면 숫자를 문장으로 바꾸면서 그 문장의 몇 자를 가지고 이어질 뒷 문장을 유추하는 것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문장이 있다면 앞의 ‘지피’만 풀고 나면 뒤 단어가 ‘지기’라는 것을 유추해 쓰는 것이다. 이 방법은 거의 답이 틀리지 않는다. 다만 위 문장 같은 경우는 백전불태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확인을 해야 했다.

 매 분기마다 사단 음어 경연대회가 있었고 군단 대회도 연간 두어 차례 있었다. 군단 대회가 있을 때면 그때마다 사단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숫자를 말로 만드는 해역을 빨리 풀 수 있게 되자 음어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었고 음어는 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사단 음어 경연대회를 휩쓸게 되었다. 처음 사단에서 일등을 하자 연대 연병장에서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대장이 사단장상과 포상휴가증을 전달해 주었다. 우리 중대에서도 크게 환영을 하며 군말 없이 휴가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포상휴가증을 들고 가도 인사계는 휴가를 보내주기는커녕 눈을 부라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넌 이 놈아 나가면 일등인데 맨날 포상휴가나 가겠다고? 합숙훈련한다고 빠지고, 일등 했다고 휴가 가고, 일은 언제 하나, 언제? 남들 다 고생할 때 합숙훈련 한다고 나가 팽팽 놀다 와서는 또 휴가 가겠다고? 사람이 양심이 있어라 이 놈아, 양심이.”

인사계는 합숙훈련 가는 걸 몹시 못마땅해했다. 이후로는 사단장상을 받고 휴가증을 받아도 보고도 하지 않고 아예 찢어 버렸다. 휴가증을 찢을 때면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단장상을 받을 때마다 연대장 이하 모두가 조회를 열고 상장을 주고 축하해 주는데 중대에만 오면 죄인이 되어야 했다. 사단에서 합숙훈련을 들어오라고 할 때마다 인사계는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다 군단 대회에서 덜컥 일등을 하고 말았다. 나보다 먼저 끝낸 병사가 한 사람 있었지만 일등을 확신했다. 하나도 틀린 게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연대 정보과장이 군단 앞 식당에서 막걸리와 불고기를 사 주었다. 이때만은 인사계도 포상휴가를 막지 못했다. 집에 가니 아버지께서 군단 병력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시곤 장하다며 아주 흡족해하셨다.

 육군본부 음어 경연대회에 나갈 선수 선발을 위한 군단 음어 경연대회에 대비한 사단 합숙훈련을 한 달가량 끝내고 사단장에게 출전 신고를 하러 갔다. 정보참모가 내가 일등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를 하자 사단장은 자신 있느냐고 물었다. 확실히 일등상을 가지고 오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일등을 하리라고 확신하며 갔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3등 상장은 의미 없는 상장이었던 것이다. 조립은 당연히 제일 빨리 끝냈는데 해역이 문제였다. 내가 3분의 2 정도 풀고 있을 때 ‘끝’ 소리가 들렸다. 문제가 유출되지 않고는 그렇게 빨리 풀 수가 없을 것이었다. 사단 정보참모도 연대 정보과장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부정이 개입된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물증이 없으니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마지막 군단 대회였고 육본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사단장께 큰소리치고 온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다.

 제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을 때였다. 대대 정보장교가 군단 장교 음어 경연대회에 자기 대신 나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자기 중위 계급장과 명찰을 달고 가면 누가 알겠느냐며 체면도 보지 않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계급 사칭을 하는 건데 그러면 큰 일 나는 거 아니냐고 버텼지만 대대장도 허락을 했다며 막무가내로 읍소를 계속하는 바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정보장교의 옷을 빌려 입고 그 정보장교와 함께 대회장인 군단사령부로 갔다. 가슴 두근거리며 그 정보장교와 같이 군단 연병장을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상사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백골'을 외치며 경례를 붙이자 그 상사는 몹시 당황하며 얼른 인사를 받았다. '아차, 내가 병장이 아니고 중위잖아. 혹 상사가 내가 중위가 아니고 병이란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정신이 아득했다. 다행스럽게도 상사는 이내 사라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일등은 하지 말고 삼등만 하라는 정보장교를 뒤로 하고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여유를 가지고 문제를 천천히 풀고 있는데 ‘끝’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도 대리로 온 사람이 있나 생각하며 속도를 더해 세 번째로 끝내고 나오자 정보장교는 ‘임마 삼등 하라고 한다고 진짜로 삼등 하냐?’며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등짝을 후려쳤다.

 “걱정 마십시오. 분명 일등일 겁니다. 난 천천히 했기 때문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겠지만 그 사람이 사병이 아닌 장교가 맞다면 그렇게 빨리 끝냈을 때는 틀림없이 많이 틀렸을 거거든요.”

 결과는 일등이었다. 정보장교는 몹시 흡족해하며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를 사주고 상으로 받은 만년필을 내게 주었다. 그 이후 오래지 않아 제대를 했기 때문에 잘 모르기는 해도 정보장교는 진급 가점은 받았을 테지만 이후 꽤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장교 음어 경연대회가 있었을 것이고 그때마다 대회에 나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대에 음어를 그렇게 잘할 병사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테니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제대를 하고 나서도 가끔 들곤 했다.

 한밤중 연대나 사단에서 상황근무자에게 음어로 전통문을 보내고 그 전통에 대한 보고 시간을 체크하는 훈련을 시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상황근무자는  나를 깨웠다. 졸린 눈으로 음어 판을 보면서 연필로 쓰지도 않고 전화기로 부르는 대로 바로 답변을 하는 모습을 상황근무자는 아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들은 전화로 불러주는 숫자를 받아 적고는 전화를 끊고 볼펜을 잡고 끙끙대며 2,30분씩 씨름을 해도 제대로 풀 수 없는 것을 전화도 끊지 않고 음어판을 들고 바로 답변을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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