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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24. 2019

페바(Feba) 부대에서의 일상

 만 1 년간의 철책선 근무를 마치고 페바로 이동하게 되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야간에 이동을 해 새벽 무렵 막사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선발대로 먼저 나온 병사들이 막사 뒤편 산속에 라면집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막사 뒤는 산뿐일 것 같은데 민가라니?

 산모퉁이를 돌아드니 머지않은 곳에 작은 초가집이 보였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라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후 배가 출출할 때는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김장김치와 함께 먹는 라면 맛은 부대에서 일요일에 먹는 라면 맛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요일 점심에 라면을 끓여주는 방식은 부대마다 달랐다. 솥에 라면을 끓여 버킷에 퍼 주기도 하고 라면 사리만 증기에 찌고 국물은 버킷에 별도로 퍼 주기도 했다. 끓여서 퍼주는 라면은 퉁퉁 불어 양은 많았지만 맛이 있을 리 없었다. 사리만 찌고 국물을 별도로 퍼주는 라면 또한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끔 부대 앞 가게에서 사 먹는 라면 맛은 부대 라면 맛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참 불가사의한 것이 휴가 갈 때 사 먹는 라면 맛과 귀대할 때 사 먹는 라면 맛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휴가증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먹는 라면은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맛이 없는데 귀대를 할 때는 그 맛없던 라면이 더없이 맛있는 라면으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  

 부대 위병소를 벗어나면 10여 호 작은 마을이 있었고 거기서 10여분쯤 걸으면 얼추 도회지 모습을 갖춘 마을와수리가 있었다. 그 마을에는 음식점과 술집이 많이 있었고 맥주 집도 있었다. 맥주 집은 졸병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비싼 집이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헌병초소는 병사들에게는 어릴 적 공동묘지나 상엿집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헌병초소를 지나다닐 때마다 허병들에게 걸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헌병들에게 걸리기만 해도 꼼짝없이 군 풍기 교육 즉, 백골 교육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사단장 차에 경례를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고 백골 교육에 끌려간 병사가  있을 정도로 병사들을 막무가내로 백골 교육을 보냈다. 휴가 갔다가 귀대 길에 마장동 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헌병에게 걸린 병사들은 부지기수였다. 술 한 잔 하고 모자를 삐딱하게 썼다가 걸린 병사, 군복 상의 단추를 끌렀다가 걸린 병사, 싸움질하다 걸린 병사 등등 재수에 옴 붙은 녀석들의 사연도 갖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백골 교육장 행이었다. 죄목은 군 풍기 위반. 헌병이 군 풍기 위반이라고 하면 군 풍기 위반이었다. 헌병을 보면 무조건 멀찌감치 달아나는 게 상책이었다. 2주간의 '백골 교육'을 다녀온 병사들은 차라리 유격 일 년을 받지 '백골 교육' 2주는 못 받겠다고 했다.'백골 교육'이 사람을 반 죽이는 거라고 소문이 나면서 마장동에서까지 헌병들의 3사단 병사들에 대한 검문이 완화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부대 위병소를 나가면 아주 작은 가게가 있었다. 명찰을 새겨주고 술과 라면을 끓여 파는 집이었다. 상호도 없는 이 집을 병사들은 '명찰 집'이라고 불렀다. 연대 출장을 갔다 올 때면 반드시 들러 라면을 끓여 먹는 집이었다.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안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기도 했다.

 명찰 집 아주머니는 엄마 같고 이모 같았다. 뭐든 먹고 나면 가게를 나오면서 스스로 외상장부에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밀린 외상값을 달라는 법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계산을 하고 없으면 다음 달로 자연스럽게 넘겼다. 외상값을 갚지 못하고 제대하는 병사들도 꽤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일로 아주머니가 짜증을 내거나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외상값 떼어먹고 가는 놈들이 있다더라는 소문만 나돌 따름이었다. 단골 병사가 제대를 할 때면 아주머니는 고깃국에 하얀 쌀밥을 대접하며 섭섭함을 달랬다. 부대를 떠나며 병사들은 가게에 들러 아주머니를 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주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찾아뵈야지 다짐했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다. 

 여름날 아침 구보를 하면서 병사들은 도로변 고추밭을 훑었다. 고추 서너 개면 아침 국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구보 인솔자가 주의를 주어도 말을 들을 병사들이 아니었다.

 아침밥을 먹을 때면 졸병들이 고참들에게 조미료를 건네주며 농을 했다.

 “김 병장님 이거 처먹으소.”

 “뭐? 처먹으라고?”

 “아니 처먹으라는 게 아니고 이 조미료를 쳐서 잡수시라고요.”

 평소에 쌓였던 감정을 병사들은 그렇게 풀었다. 고참들은 웃으면서 넘겼다.

 페바로 이동하고부터는 매일 힘든 작업의 연속이었다. 봄부터 시작된 작업은 날씨가 추워져야 끝난다. 산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하면서 참호를 파고 벙커를 짓고 철조망을 쳤다. 돌을 깨고 땅을 파고 흙과 돌, 시멘트를 등에 지고 날랐다. 군인이 아니라 노무자였다. 군복 바지를 잘라서 만든 반바지만 걸치고 작업을 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노무자였다.  일요일도, 휴일도 없었다. 벙커 작업을 할 때는 시멘트가 굳어지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밤에도 횃불을 들고 작업을 강행해야 했다. 벙커 작업을 마무리할 때는 행정반까지 총동원되어야 했다.

 부대 막사에서 행정업무를 보며 빈둥거리다가 가끔 작업장으로 심부름을 가기도 하고 현장에 텐트를 치고 작업을 돕기도 했다. 반바지만 입고 웃통은 벌거벗은 채로 작업을 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지만 병사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미있게 작업을 했다. 가끔 주어지는 휴일에는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라디오로 노래를 듣기도 하며 휴식을 취했다.

 부대에서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보며 시간을 죽이던 중 대대 서무계가 중대 서무계들을 읍내 맥주 집으로 불러냈다. 대대 서무계 전원이 기분 좋게 술은 마셨지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술을 마시면 없던 배짱도 생기는 법이라 서로 술값 대신 인질로 남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대대 서무계가 친하게 지내던 보안대 병사에게 전화로 부탁을 해 그가 보증을 서고 우리는 간신히 그 술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얼마간이 지나고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대대장이 노발대발하며 대대 서무계를 모두 영창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외상을 갚지 않자 보증을 섰던 보안대 병사가 대대장한테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중대장들이 대대장에게 사정사정을 해 간신히 영창은 면하고 서류로만 영창을 산 걸로 처리가 되었다.

 대대장 지시로 중대 서무계 모두는 영창 대신 작업장으로 가서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 중대장이 가장 힘든 일만 골라서 시키라고 각 소대장들에게 지시했지만 분대장을 비롯한 고참들은 ‘일 안 하던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하면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보이지 않으면 삽질 같은 쉬운 일만 시켰다. 그렇게 5일쯤 지나자 다시 본부로 복귀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대대 서무병 전원이 행정업무에서 손을 뗐으니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조수가 있었지만 조수로서는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둑을 잘 두는 동기가 있었다. 그 친구는 수시로 중대장이나 대대장한테 불려 다니며 바둑을 두었다. 이 친구가 바둑을 가르쳐 주겠다고 따라다니며 성화를 부렸지만 바둑보다는 장기가 나을 것 같았다. 대부분 병사들이 장기를 두었을 뿐 아니라 PX 차용 쓰기 내기장기를 두면서 물러 달라 안 된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장기 두는 것을 구경하면서 두는 방법을 대충 알게 되자 하급자 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겁 없이 덤볐다가 하급자들에게 판판이 깨졌다. 그에 따라 PX차용은 늘어만 갔다. 이들은 늘 PX 차용 쓰기를 고집했고 차용 쓰기를 거절하면 꼴에 재미가 없다며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판판이 지고 PX에 가서 외상을 달고 과자나 음료수를 사 오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약도 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장기를 알게 되면서 한 달 내에 장기로 중대를 석권하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장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냐고 모두 코웃음을 쳤지만 자신이 있었다. 까짓 잘 두어야 동네 장기, 군대 장기 아니던가. 그때부터 맹렬히 장기 공부를 했다. 장기판을 들고 산속으로 가서 하루 종일 두기도 하고, 창고 방에 숨어서 두기도 했다. 장기를 두다가 인사계한테 들켜 도망을 가면서도 장기판은 들고 도망을 갔다. 그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중대 고수들을 모두 이길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그동안 받은 수모를 몇 배로 갚을 수 있었다.

 바둑을 가르쳐 주겠다던 동기 녀석은 훈련 중에 포열을 메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지면서 손가락이 포열에 끼어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 했다. 제대를 하고 이 친구에게 마침내 바둑을 배웠는데 녀석은 운영하던 기원이 어려워지자 어느 날 잠적을 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바둑을 둘 때마다 녀석이 생각난다.

 겨울이 가까워 오면 고참들은 페치카 주변에 진을 쳤다. 소대마다 ‘뻬당’이라고 불리던 페치카 당번이 있었다. 석탄 가루를 물에 개어 젖은 상태로 페치카 속에서 맹렬히 타고 있는 불 위를 덮고 군데군데 숨구멍을 뚫어 넣으면 석탄은 맹렬히 타면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낸다. 석탄가루를 하루종일 끼고사는 뻬당들은 늘 옷이나 얼굴, 손이 석탄 검댕이 투성이었다. 빼당은 특별히 부지런하고 요령을 피울 줄 모르는 병사에게 맡겨졌다. 페치카 불을 꺼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늘 페치카 앞에서 살았고 아침이면 고참들에게 세수할 물을 떠다 바치기도 하고 빈 통조림 깡통에 라면을 끓여다 바치기도 했다. 이래저래 페치카 당번은 고참들의 이쁨을 받았다. 내무반 페치카 주변은 언제나 고참들 차지였고 왕 고참들은 페치카 위에 올라가 장기를 두기도 하고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빼당 덕분에 내무반은 한 겨울에도 춥지 않고 따뜻했다. 병사들은 산에서 진달래를 캐어와 화분에 심고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게 했다. 진달래 몇 송이로 한겨울에도 마음이 훈훈해졌다.

 부대 옆 산 밑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쓰레기는 나오는 대로 바로 태우기 때문에 쓰레기장이라도 쓰레기는 거의 없이 늘 깨끗했다. 졸병들은 이 쓰레기 소각장에 숨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처음 얼마간은 소각장에서 숨어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었지만 오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연기가 올라오면 라면 끓이는 것이라 눈치챈 고참들이 우르르 달려가곤 했다. 졸병은 눈물을 머금고 고참들과 라면을 나누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면 한 개를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라면을 끓이는 주변에서 여럿이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라면을 끓이던 녀석이 느닷없이 펄펄 끓는 라면 냄비에 침을 탁 뱉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 고참 녀석이 ‘아 여기는 침을 뱉는 데냐?’ 하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라면 냄비에 같이 침을 탁 뱉는 것이었다. 아 그 순발력이라니! 그 라면을 누가 먹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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