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석 Oct 30. 2019

43년 만에 만난 전우들

   어떤 인연이 그토록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초로의 사나이들을 연결하여 한 자리에 모으게 했을까? 1박 2일간의 짧은 만남 그리고 1년간의 긴 기다림. 전국에 흩어져 사는 여덟 명의 초로 신사들이 별스런 만남을 이어가는 우리는 40여 년 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함께 보낸 전우들이다. 10명도 채 되지 않은 중대 행정반에서 짧게는 몇 달, 길어야 2년을 넘지 않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같이 했다는 그 인연 하나만으로 매년 만남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1974년 3월에 3사단 23 연대 12중대에 전입을 해 1976년 9월에 전역을 하기까지 2년 6개월여를 행정반에서 보내면서 10명의 고참들과 그만큼의 후배 졸병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당시 고참들은 갓 전입한 졸병에게는 하늘보다 높은 존재였다. 그랬는데 오랜 세월 잊고 지내다가 다시 만난 그들은 기껏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과 다시 만나기까지는 4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이별 뒤 만남이지만 그 만남에는 어색함도 쑥스러움도 없었다. 그간의 세월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43년 전의 그 얼굴에 약간 주름이 지고 회색 빛 성긴 머리  모습으로 그들은 거기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8인이 옛날 함께 근무했던 강원도 철원 옛 부대를 찾았다. 8인의 근무지는 조금씩 달라 모두가 함께 근무했던 부대는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에 위치했던 부대와 철책선뿐이었다. 당시는 1년간의 철책 근무를 하고 2년간은 페바에서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수시로 부대 이동을 해야 했고 때문에 각자가 군 생활을 한 지역은 조금씩 달랐다. 

  45년 만의 옛 부대 방문이었으니 그 부대 막사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스레한 기억을 되살리며 굽이굽이 차를 몰아가니 아 거기에 잡초에 뒤엉킨 위병소 담장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지키는 군인 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운 담장뿐이었지만 위병소 자리가 분명했다. 위병소를 지나 좀 더 올라가니 막사가 있었던 흔적은 역력한데 막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 흔적만이라도 더없이 반가웠다. “야, 저기가 우리 중대 자리네.” “저기는 식당 자리, 저긴 연병장. 9중대, 10중대, 11중대, 대대본부는 저기 저 자리였지.” “저 자리는 줄빳다 맞으려고 떨며 기다리던 자리가 분명해.” 모두들  들뜬 모습으로 마치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어린애들처럼 왁자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인연의 끈이 우리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했을까? 하늘같이 높고 어렵기만 했던 선배들을 다시 만나도록 무엇이 이끌었을까? 군에서 제대를 하고도 유독 한 선배가 마음에 큰 짐으로 남아 있었다. 행정반 막내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힘들게 보내던 때에 아주 살갑게 대해주던 선배였다. 그는 유독 내게 잘해 주었다. 다른 졸병들에게도 그랬겠지만 얼굴 찡그리는 법이 없었고 한마디 건네는 말에도 정이 묻어 있었다. 까마득히 남은 군 생활에 대해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제대를 했다. 내가 전입을 간 지 3개월여 지났을 때였다. 떠나면서 그 선배는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약속대로 내게 편지를 보냈다. 그랬는데 나는 그에게 답장을 하지 못했다. 졸병 생활에 바빠 답장을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 일이 일생을 짓누를 짐으로 남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느꼈을 배신감과 의리 없는 놈으로 낙인찍혔을 생각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찾을 방법은 없었다. 

  4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직장의 젊은 직원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군 시절 내게 아주 잘해 주었던 또 한 선배와 같은 마을 출신 직원을 만나게 되고 그 직원을 통해 그 선배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 선배 역시 그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나의 권유대로 또 다시 그의 고향마을을 찾은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온갖 노력 끝에 정말 어렵사리 그를 찾았다는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그 고참 선배는 우리 집과 직선거리로는 채 1Km도 되지 않는, 그것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2년 전 8명이 처음 만나던 날은 햇살 따사롭던 초가을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충남 공주에서 첫 만남을 가질 때는 눈물만 뿌리지 않을 뿐 이산가족 상봉 그대로였다. 기적 같은 만남이라고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존댓말도 잠시, 이내 옛날로 돌아갔다. 옛 서열이 현 서열이 되어 내가 제일 졸병이 되었다.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지만 억울할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찾은 전방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온통 지뢰지대였던 그 땅에 지뢰지대는 표시도 없고 철책선 2,30리 밖에 쳐져있던 민간인 통제선도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 보이는 철책은 당시보다 훨씬 북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예전 수없이 오르내리던 그 길도, 온갖 애환이 서린 막사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무 몇 그루 없던 시뻘겋기만 했던 산은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철책선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부근조차 갈 수 없었다. 우리의 발자국이 수없이 아로새겨졌을 그 길은 상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가로막은 군인들도 안타까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방 철책과 GP들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모두 말 없이 한 동안 산등성이와 남북을 가르는 철책과 GP, 당시 북한 지역 요새로 소문났던 오성산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그때, 춥기만 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으리라. 

 당시 민통선 안 마을이었던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에 숙소를 잡았다. 깜깜한 밤에 위험을 무릅쓰고 소주를 사러 다니던 마을이었다. 연대본부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거나하게 소주잔을 걸치고 어둠을 헤치고 돌아올 때 반갑게 어둠을 밝혀주던 마을이기도 했다. 옛날 그 시절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다가 지금까지 찾지 못한 한 전우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우리가 만날 때마다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화제에 오르고는 했지만 그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 한 선배는 그의 고향인 경주까지 찾아가 학교를 샅샅이 뒤지는 등 노력을 했지만 그는 꽁꽁 숨어 나타나지를 않았었다. 그러던 그를 이번 만남에서 마침내 찾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로 왁자할 때 인터넷 포털에 그의 이름이 뜬다는 외침이 들렸다. 그의 고향, 경주의 한 초등학교 졸업생 명부에 그의 이름이 뜬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평범한 그의 이름이 포털에 뜨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름이 특이해서였을까? 연령대가 대충 맞는 것 같고 그의 고향에 있는 학교니까 그가 분명하다고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우리가 헤어지고 난 다음날 저녁, 그의 이름을 찾아낸 그 선배가 그의 소식을 카톡방에 올렸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생 카페 관리자를 찾아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십여 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내년 모임에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모두 기대에 부풀어 헤어졌었는데 그가 고인이 되었다니 아 이럴 수가! 아마도 하늘에 있는 그가 우리가 애타게 찾는 모습이 안타까워 우리에게 인터넷을 검색해보도록 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처럼 일찍 세상을 하직하지 말고 오래오래 만남을 이어갈 수 있도록 평소 건강을 잘 보살피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낸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말년 병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