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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Nov 05. 2020

앙드레 김

사람을 만날 때 선입견을 가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 선입견이라는 것이 옳든 그르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정보가 정확하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으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앙드레 김 - 그는 한국 패션산업의 개척자였고 패션계를 빛낸 큰 별이었다. 그의 패션쇼는 늘 성황을 이루었고 패션쇼를 할 때마다 매스컴의 큰 찬사를 받았다. 초일류 탤런트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패션쇼를 호화롭게, 화려하게 꾸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세인들, 특히 뭇 여성들을 패션쇼장으로 불러들였다.     

 

문화를 담당하고 있는 과장이 어느 날 뜬금없이 앙드레 김을 우리 시 홍보대사로 초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앙드레 김입니까?”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말이었다. ‘고양중학교를 다녔고 우리 시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 가운데 한 분일뿐 아니라 그분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이미 의중을 타진했느냐는 물음에 그녀가 짓는 난감한 표정에서 사전 교감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말씀을 드렸다면 어쩔 수 없겠는데 그분이 적절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양반의 복장이나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진한 화장, 머리 모양 등이 좋게 보이지가 않아요.”

며칠이 지난 후 그로부터 인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그 과장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현관으로 마중을 나가 만난 그는 사진에서 보던 아래위 새하얀 복장에 짙은 화장을 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몸을 더 낮추게 하는 방법을 아는 분 같았다.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낮춤이 아니라 몸에 밴 겸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사람이라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분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유명인이라 하여 거들먹거리거나 사람을 무시하는 듯 한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그 분은 ‘앙드레 김 패션쇼’를 할 때면 어김없이 초청장을 보냈다. 패션쇼장에 가면 환한 미소와 함께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시간을 내 찾아준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등에서 만날 때마다 아내와 딸의 안부부터 물었다. 안부인사를 물으면서도 꼭 극존칭을 썼다. ‘사모님께서는 안녕하시고 따님께서도 잘 계시지요?’ 하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 때면 매번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는 새하얗게 칠한 나뭇가지와 종이로 만든 트리를 정성스레 만들어 보내주었다. 결코 비싸지는 않으면서도 보낸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정성이 밴 선물이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보내준 선물과 그것을 보낸 그분의 마음과 정성에 감동하곤 했다. 패션쇼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그분은 누구에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인사는 꾸밈이 없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임을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딸아이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다. 어린 학생인데도 극존칭을 써주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장래 진로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으니 어찌 좋아하고 매료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드넓은 킨텍스 그랜드볼룸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자리에 앉은 사람보다 서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고양에서 처음 열리는 패션쇼였다. 패션쇼를 생애 처음으로 보는 시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패션쇼장은 시민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화려한 의상과 경쾌한 발걸음, 눈앞에 펼쳐지는 연예계 톱스타들의 화려한 자태, 거기에 앙드레 김의 카리스마까지 더해 그랜드볼룸을 가득 메운 여성들의 가슴은 한껏 설렜을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화려하게 진행된 패션쇼가 끝날 무렵 앙드레 김선생께서 갑자기 나를 무대로 불러냈다. 앙드레 김 그 분이 마지막 감사인사를 하고 내게 꽃다발을 건네면서 패션쇼는 막을 내리고 앙드레 김을 위시한 모델 등 출연진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무대 뒤로 퇴장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들을 따라 무대 뒤로 들어가야 하는 건지, 그냥 돌아서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순간 그들을 따라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은 순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무대를 혼자서 걸어 나오기로 했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눈들이 오직 나만을 쳐다보고 있는 무대를 말이다. 관중들이 앉은 자리보다 훨씬 높은 곳, 행사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만들어진 무대였다. 중앙무대에 붙여 T자형으로 드넓은 그랜드볼룸에 맞추어 만들어진 그 긴 거리를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혼자 걸어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언 할 수 없는 부담감을 안고 수많은 시민들, 수많은 여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뎠다. 쑥스러움과 멋적음을 감추기 위해 에라 모르겠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시민들을 향해 흔들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갑자기 관중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앙드레 김의 고향 사랑은 각별했다. 그의 출생지 구파발은 진작 서울에 편입되었지만 그가 태어날 때는 고양군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양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모교인 고양중학교에 매년 적지 않은 장학금을 내놓기도 하고 가끔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고양시청 소속 장미란 선수가 카퍼레이드를 겸한 축하행사를 할 때에는 바쁜 일정을 쪼개어 행사장으로 달려와 장선수를 격려하고 축하를 해주기도 했다.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로 우리나라 패션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 아름다운 이름을 세계만방에 떨쳤다는 찬사도 받았지만 1999년 옷 로비 사건 청문회에 불려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청문회에서 그의 세련된 이름 대신 김봉남이란 토속적인 본명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앙드레 김은 2010년 유명을 달리했다. 장례가 5일장으로 발표되었기에 마지막 날 조문을 가야겠다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장례가 4일장으로 바뀌는 바람에 조문을 하지 못하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미안감이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지금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천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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