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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Feb 02. 2022

난롯가에서

 추수가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면 아버지는 아침마다 할머니를 위해 놋쇠 화로에 숯불을 가득 담아 안방에 들고 들어오시곤 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숯을 가득 담은 화로는 이불을 개느라 열어둔 방문으로 들어온 바깥공기로 차가워진 방안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아침밥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 집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집 안방은 크기도 했지만 방바닥이 언제나 뜨끈뜨끈했고 외풍이 없어 아주 따뜻했다. 할머니들은 방안에 들어와 앉기 무섭게 담뱃대를 꺼내 화롯불에 불을 붙이곤 했다. 안방은 금세 담배 연기로 가득 찼지만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다. 할머니들로 안방이 가득 차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화로 속에서 이글거리던 열기는 점차 그 위력을 잃어갔다. 할머니는 화롯불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수시로 부젓가락으로 화로 속의 꺼져가는 숯을 재 속에 갈무리하며 다독였다. 

할머니들은 누구나 담배를 피웠다. 간혹 한, 두 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할머니를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머니의 담뱃대는 시꺼먼 댓진으로 막히지 않도록 수시로 댓진을 파내야 했다. 할머니 담뱃대의 댓진 청소는 어린 내가 도맡다시피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댓진을 파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갑갑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할머니보다는 눈 밝은 손자가 훨씬 담뱃대 청소에 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안방으로 화로를 들고 들어오시면 할머니 담뱃대에 담배를 재어 화롯불에서 불을 붙여 할머니께 드리곤 했다. 아버지께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그런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겨울에 접어들자 교실에는 난로가 설치되었다. 난로는 화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난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많이 뜨거울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난로에는 불이 피워질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누군가의 엄마가 장작을 조금 가지고 학교에 오면 난로에 불은 피워졌지만 그 난롯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난롯불이 다 타고나면 교실 안은 더 추웠다. 겨우내 학교에서는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당시 몸에 걸친 옷이라고는 내복과 겉옷 한 벌, 그리고 양말이 전부였다. 양말을 신지 않고 학교에 오는 아이도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아주 드물었고 대부분이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중, 고등학교라고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교복 안에 두터운 셔츠는 입고 다녔다. 그래도 춥기는 마찬가지긴 했지만. 

겨울이 시작될 무렵 군에 입대를 했다. 입영열차를 타고 밤 12시가 넘어 논산에 내렸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수용 연대에 도착을 하여 들어간 막사는 의외로 따뜻했다. 난롯불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던 것이다. 석탄 가루가 내무반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불평하지 않았다.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도 춥지는 않게 지낼 수 있었다. 페치카 병이 밤낮으로 페치카 불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철책으로 부대가 이동을 했지만 내무반 바닥이 따뜻한 온돌이어서 거기서도 춥지는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저녁이면 온돌을 데우기 위해 불을 때야 했지만 그 시간은 졸병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마룻바닥이 깔린 막사로 이사를 했다.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철원의 추위는 정말 대단했다. 마룻바닥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야전잠바 위에 스키 파커를 입고 털모자와 두터운 장갑까지 쓰고 끼고 매트리스를 2장씩 깔고 담요를 7, 8장씩 덮고 잤지만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철책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따끈한 온돌방 내무반이 한없이 부럽고 그리웠다. 영하 20도가 넘는 겨울밤을 불기 하나 없이 마룻바닥에서 자는 걸 상상해 보시라. 낮이라고 춥지 않겠는가.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한낮에도 내무반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행정업무를 봐야 했다. 몸이야 옷으로, 모포로 가리지만 장갑을 끼고 글씨를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1974년, 1975년 당시는 제2차 유류파동이 전 세계를 휩쓸어 석유값이 급등하고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국가 경제가 아주 어려울 때였다. 상급부대에서는 매주마다 난로를 설치하지는 않았는지 단속하러 다녔다. 장작 난로 하고 유류파동 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장작 난로마저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고참병들이야 방바닥이 따끈한 인사계 방에서 인사계에게 알랑방귀를 뀌어가며 낮시간을 때울 수 있었지만 졸병 주제에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눈치를 봐가며 인사계 방 한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있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때의 모멸감과 참담함이란... 낮에는 어떻게든 핑곗거리를 만들어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난로를 설치해도 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신이 나서 난로를 설치하고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지만 가까운 산에는 땔감으로 쓸만한 나무가 없었다. 쓸만한 나무는 온돌방 땔감으로 진작 잘려갔지 남아났겠는가? 몇 시간을 헤매야 간신히 얼마간의 나무를 할 수 있었다. 나무뿌리까지 캘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불꽃이 이글거리는 난로를 독점하고 책을 읽으며 라면을 끓여 먹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있는가? 그 호사를 누릴 기회를 가져보지 않고는 그 달콤함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뜻한 난롯가에서 장작불을 뒤척이며 특식 고추장을 넣고 끓인 라면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만 먹는 그 호사를, 그 특권을 그것도 전방부대에서 누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1시간이면 끝나는 상황근무를 후임 교대자를 깨우지도 않고 2시간, 3시간을 내리 근무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서 독점하는 난롯가의 자유와 행복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군 생활 중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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