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마시고 싶은 곳]
도쿄에 자주 가면 신주쿠나 시부야 보다는 좀 더 조용한 생활밀착형 여행을 찾게 된다. 이번에는 아사쿠사에서 멀지 않은 시바마타로 1969년 일본 영화 '남자를 괴로워'의 배경이 된 곳이다. 1995년까지 48편의 시리즈가 제작될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은 국민영화다. 시비마타역부터 극 중 주인공 토라상의 동상, 박물관, 단고가게 등을 만날 수 있다. 다이샤쿠텐까지 가는 길의 상점들은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어 일찍 가면 문을 열기 전 준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도쿄로 출발 전,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보지 못 한 아쉬움 마음은 있지만 부딪쳐 보기로 했다. 아사쿠사에서 출발해 2번을 갈아타야 하는데 걷는 시간과 별 차이가 없어 타가사고역에서 내려걸었다. 여행하면서 걷다 보면 자연스레 방향감도 생겨 자주 시간이 나면 걷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을 알려면 많이 보는 것만큼 남는 건 없다. 몸으로 부딪히면 앉아서 읽은 책 보다 오래 각인되는 이유도 같은 것이기에 부지런히 걸었다.
걷다 보면 도쿄 부촌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주택가를 만나기도 하고 철길옆 낡은 집들에 널려있는 빨래를 보기도 한다. 일본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옛 도쿄의 감성을 접하기도 한다.
아침 일찍 나오니 공기도 맑고 사람도 없어 이 마을의 주민인 듯 천천히 즐겼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집집마다 빨래가 많다. 공간활용이 좋은 일본인들답게 빨랫줄에 집게까지 볼 때마다 탐난다. 한 번 길을 헤매도 잘 찾았다. 역에 도착해 토라상의 동상을 인증하고 다이샤쿠텐까지 걸었다.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상점들은 200M로 길지 않지만 교토를 연상할 만큼 예스러운 거리다. 단고가게 위치도 봐 두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가고 싶었던 곳'야마모토테이'를 첫 번째로 갔다. 1920년대에 지어진 사업가의 저택으로 그 시절 일본식 주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정원도 아름답지만 나무로 빗 댄 홑창이 인상적인 곳이다.
창을 비추는 햇빛과 예스러움이 남아있는 다다미방, 그리로 창문너머로 보이는 초록색의 싱싱한 자연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숨을 멈췄다 크게 뱉었다. 잠시 다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빠짐없이 구석구석을 보며 고풍스러운 개인 저택의 멋스러움을 느꼈다. 100년도 넘은 저택에서 차 한잔하고 싶었는데 날씨도 그 마음을 아는지 너무 화창하다. 나보다 먼저 온 엄마와 어린아이가 있었다. 4살 정도 된 여자 아이인데 여기저기를 보며 조잘조잘하는 목소리에 엄마는 천천히 정원을 바라본다.
나처럼 정원이 보고 싶었을까. 그 눈빛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차 한잔 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겠지.
주말이라 입구 앞에는 사진기사가 대기하고 있다. 들어올 때 잠시 주춤한 이유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어 지나쳤었다. 들어간다는 동작을 하니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그때 본 알림판에는 시간대별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단체 손님의 예약인가 했는데 아름 다운곳에서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찍는 예약 시간표였다. 잠시 앉아 있으니 예약 순서대로 가족사진을 찍는 장소로 바뀐다. 정원에서도 찍고 다다미방에 앉아서, 창가에서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30분 정도 간격으로 사진사, 찍히는 대상자들도 바뀐다. 갓난아이도 찍는 걸 보면 아마도 백일 아니면 돌사진도 찍는 건가. 정장을 갖춰 입은 한 부부들, 아이들, 노부모 누구든 부담 없이 방문해 사진을 찍는다. 입장료는 있지만 꼭 음료를 마실 필요는 없어 사진만 찍고 나가도 눈치를 보지 않는다.
사진을 찍을 때는 모두가 웃고 행복한 모습이기에 내 마음도 그 표정에 넉넉해졌다. 카메라 렌즈만 보면 사람들은 웃는다. 평소에도 렌즈를 꽂고 다녀야 하나. 갑자기 엉뚱한 생각도 든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낯선 사람들을 보며 여행하며 지친 나는 그 미소로 기운을 얻어간다. 말차로 한잔 마시며 조용히 쉬고 나왔다.
정원을 지나 길을 건너면 에도가와 강이 나온다. 한강 고수부지처럼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탈 수 있다. 물론, 빠질 수 없는 축구장도 있어 주말이라 벌써부터 부지런한 사람들은 뛰고 있다. 잠시 올라와 쉬며 자전거 주차장을 봤는데 전기 충전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있어 신기했다. 어디를 가든 자전거 주차장이 있을 만큼 도쿄도 자전거를 많이 탄다. 외곽으로 나와 전기충전소까지 괜히 부럽다.
여유롭게 걷고 다이샤쿠텐으로 왔다. 1600년대에 세워진 사원으로 500년 이상 된 소나무가 있는 곳이다. 경내 볼거리 중 하나가 일본 정원인 '스이케이엔'이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옛날 마룻바닥을 걷는다. 한 바퀴 돌며 사찰 내부의 관람이 가능하고 의자에 앉아 그림 같은 정원도 볼 수 있다. 입장료는 왜 받나 했는데 정원에 앉아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경내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딴 세상을 만났다. 아직 오전이라 사람들도 많지 않아 주말 오전 내내 넉넉함을 즐겼다.
도쿄 여행 중 잠시 쉬고 싶었는데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올라왔다. 홀로 여행으로 지쳤을 때 다시 마음을 올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을 때가 있는데 도시도 크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높은 빌딩에 여기가 서울인지 도쿄인지 내 고향이 생각날 때 옛 향수가 넘치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보자. 그게 다시 여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고 나의 마음을 잡아 주기도 한다.
나에게 여행이란,
자주 오는 거리가 있다면 가끔씩은 앞보다는 샛길로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