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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소마 Jan 28. 2023

#3 킹반인이 되지 않으려면

누구나 타인의 영역에선 일반인이다

저의 생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쓰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의미로는 진영에 관계없이 해야 할 말은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이유에서 해당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존재한다 - 한나 아렌트


내가 다니는 병원 중 한 곳의 원장님은 의료인으로서, 그리고 병원장으로써 괜찮은 사람이다. 치료 방법 개선에 대한 임상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고, 직원들에게 매 달 책을 사비로 사줄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단체 여행도 보내주는 등, 몇 년째 다니는 병원이지만 모두가 그대로 일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러한 원장님도 음모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정치 성향이 다르고 견해가 다른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점이다. 하지만 그 다름의 방향이 '투표 부정'과 같은 당위명제가 아닌 사실명제에 대해 나타난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다.


물론 그 부분만 뺀다면 인간적으로도 좋은 분이고 진료도 꽤 만족스러워서 (개인 SNS에 쓴 글이고, 병원에서는 그러한 얘기가 일절 없다. 우연히 검색해 보다가 알게 된 것...) 계속 다니고 있다. 여기서 느낀 점은, 저런 사람마저 음모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지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나 역시 사회과학에 대해서 (학사 수준이나마) 전공했지만, 행정학이나 국제정치학, 언론학과 같은 인접학문에 대해선 비전공자와 다를 바가 없으며 자연과학이나 공학 같은 아예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무지 혹은 신념으로 인하여 음모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물론 군 생활 역시 하나의 경험이지만, 병사로 경험한 부분이 간부 혹은 외부 전문가에 비해 제한될 수 있음에도 그에 대한 자각이 없다.


음모론의 분파 중 하나는 '민중'에 기반한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현실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경험에 기반한 자신들의 주장이 옳으며, 소위 엘리트 집단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논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라고 치부하는 경우이다.


이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정작 이 주장을 비판한 사람들 중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널렸다.


그 분야 중 하나는 아무래도 법학이 아닐까 싶다. 물론 법관 및 법률가들의 폐쇄적인 구조로 인한 엘리트주의는 김두식 교수를 비롯한 내부에서부터 지적되는 문제이고, 입법 역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 (존속범죄 등)가 있는 만큼 신성불가침한 영역이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엄밀하게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닌 법학 중에서 일부분인 '형법' 중 '양형 규정'을 이유로 "법은 쓰레기이며, 판사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밖에 안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 AI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터넷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데이터 상으로도 국민참여재판의 무죄 비율과 형량의 정도는 기존 법관이 진행하던 재판에 비해 관대하게 나온다


하지만, 법감정과 다르게 실제 상황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변호사들의 소장과 변론, 그리고 피고인의 호소에 대해 배심원들이 (이에 대해 익숙한) 법관에 비해 더 취약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대중의 공분을 사는 성범죄 재판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AI에 대해서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구글에서마저 이력서를 분류할 때 소수 집단에 대한 편견을 답습한 결과가 나왔다. AI는 만능키가 아니며, 육체를 가진 인간이 현실상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자원의 투입을 통해 학습하는 만큼 결국 비슷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김철민씨는 폐암 진단 후 펜벤다졸을 복용했지만, 효과가 없었음을 본인 스스로도 나중에는 인정했다


지금은 좀 잠잠해졌지만, 한때 '구충제' (펜벤다졸)에 대한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김철민 씨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도 펜벤다졸 옹호자들은 용량을 잘못 써서 효과가 없었다, 김철민 씨의 발언이 다른 사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매도하였다)


단순히 말기 암환자가 이것저것 해본다 수준을 넘어, 음모론 추종자들은 의사들이 약을 팔아먹기 위해 임상을 반대한다, 실제로 살아난 케이스들도 있는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은폐한다는 식으로 비판 수준을 넘어 인신공격 수준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글을 쓸 수 없고,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한 신약들이 임상에서 엎어지는 사례는 엄청 많다. 심지어는 탈리도마이드처럼 임상에서 통과를 해서 시판이 되었다가도 부작용 때문에 판매금지가 되었다가 다시 항암 효과가 있어 제한적인 실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역시 법관의 문제처럼 실제 의학계의 흑역사 (헬라 세포 등)과 제약회사의 커미션으로 인한 펜타닐 등의 약물 남용, 그리고 의사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부분에서 비판해야 할 점은 있지만, 음모론은 이 부분과 별개로 엄한 곳을 때리고, 이 과정에서 여럿이 죽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현실 위에 서 있다


대충 사는 건 쉽다. 이건 인간의 생존을 위한 인지적 투입의 최소화라는 진화 과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결국 음모론의 상당수는 기존 집단의 실책을 이유로 그들의 메시지가 모두 쓸모가 없다는 '반기득권 - 반지성주의' 쪽에 논리를 두고 있다. 이는 근대사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현대의 큐아논과 같은 집단에서도 보이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무지한 대중'으로만 낙인찍는다면 아무 발전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음모론의 원인 중 하나가 기존 집단의 실책이었고, 현대 사회는 결국 다수결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 음모론은 지식인도 타 부문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원론적인 방법이지만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가능한 한 공개와 참여를 유도하고, 가짜뉴스에 대해 중학교 1학년도 이해할 수준의 설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곰팡이는 덮어 두면 더 자라고, 햇볕에 꺼내야 말라죽는다는 미 연방 대법관 브랜다이스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포함해서) 언제든지 나는 틀릴 수 있고, 틀리다면 그 이유에 맞추어 나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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