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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소마 Feb 04. 2023

#4 보호받을 가치 있는 권리?

보편인권을 위하여

저의 생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쓰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의미로는 진영에 관계없이 해야 할 말은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이유에서 해당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그거랑 그게 같나요?


최근 "차별금지법"에 대한 찬반 논쟁이 거세지면서 그와 관련된 사례도 많이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케이크 제작 거부에 대해 법정 소송까지 갔고, 한국에서는 '노 OO존'이 차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매우 거센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진보적이라고 자청하며, 차별금지법의 법제화와 노 OO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마저도, 최근 일련의 전과자에 대해 벌어지는 '공포 마케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당사자성'을 이유로 그러한 여론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자는 어디 전과자를 성적 지향과 같은 것에 비비냐고들 하겠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성적 지향도 선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며, 헌법과 차별금지법에서는 선천적 신분뿐만이 아닌 후천적으로 얻어진 신분을 이유로도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숭고함과 권리는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예전에 (대법원 판결 이전) 양심에 기반한  병역거부 행위와 이로 인한 처벌에 대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양심의 자유로 보호될 가치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진보와 보수 양 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이야 당연히 "신성한 병역에 대한 침해, 우리는 비양심적이라 군 복무를 했냐"와 같은 표현은 이전부터 있왔던 지라 예상을 했지만, 진보주의자들로부터도 "어디 숭고한 행동을 그딴 식으로 표현하냐 이 군국주의자야"라는 비난을 마찬가지로 받기도 했다.


이석기와 통진당 (나는 이들이 시대착오적이지만 처벌은 별개라 생각) 때도 그렇고, 숭고함과 권리는 별개이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빨갱이는 죽여도 돼"에서 "빨갱이"에 대해서만 평가하니 몇몇 왼쪽 진영에서 이석기 / 통진당을 숭고하게 평가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막말로 그 병역거부를 하는 집단의 상당수는 "머릿속이 꽃밭"인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고대에 만들어진 교리를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해서 정작 사람의 생명을 해하고 있으며, 내부 분위기는 진보는커녕 대한민국에서 제일 꽉 막힌 집단"인데 왜 진보에서 그걸 옹호하는가 묻고 싶다.


우리 편 박정희를 경계해야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에서 박정희의 경제 발전에 대한 공과 별개로 그가 주장한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과 가부장제를 비롯한 사회적 권위주의에 대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박정희를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권위주의에 매몰된 사람이 있으며, 자신들의 기준에서 사회질서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주장이 있으면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분쇄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 편 박정희' 신봉자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수정권 셧다운제와 아청법, 신상공개에 대해 신자유쥬의 운운하며 반대하던 진보들이, 진보정권이 들어서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정권이 한 일이다' '요즘 시대를 보니 유지해야겠다' '범죄자에 감정이입하지 말라'는 식으로 추태를 벌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https 규제와 같은 정보 액세스의 자유, 사생활 비밀의 자유와 같은 이슈에 대해서도 단지 '야동 안 보면 죽냐'와 같은 대응밖에 못하는 것이다. 개인이 권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닌, 국가가 규제의 당위성을 입증해야 하는 기본 명제를 깎아먹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지지한다


좀 멀리 돌아왔지만 볼테르가 말한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말처럼 나 역시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인권에 부합하며, 동시에 나의 인권을 지킬 수도 있다는 실질적인 이유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가 '감옥은 그 나라의 문명의 척도'라고 한 것도 그들의 권리가 최저임금처럼 이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롤스가 말한 "가장 취약한 사람에 대한 가장 우선적 배분"이라는 사회적 정의와, 여성과 어린이의 행복을 명시한 헌법적 가치와도 일치한다.


그게 없이, 단순히 우리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연대를 가장한 진영 논리를 펼친다면, 그 논리를 공공의 권리를 이유로 들어 파훼하려는 사람에게 밀릴 수밖에 없으며, 안타깝게도 이 한국에는 여전히 그 의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사람이 한가득인 상황이다.


미란다를 기억하며


역사적으로 사회적 진보는 우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재소자에게 TV와 투표권을 보장해야 하냐는 헌법 소원에서, 아무리 나쁜 짓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상 보장된 묵비권과 변호사 선임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이건 법관의 머릿속이 꽃밭이라서가 아니다. 이 원칙이 하나가 깨지면 다음 원칙에서도 얼마든지 깨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개인의 권리가 무제한적으로 제한이 가능해져서, 이로 인한 폐해가 막심했던 역사로부터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일도 진흙탕에서 싸울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숭고함과 권리는 별개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단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이러한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실질적으로 나의 권리도 보장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노 쉬발 킵 고잉'을 외칠 것이다


약간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사람은 결국 안전과 자유 모두 잃게 될 것이다 - B.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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