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출퇴근 여행
이건 쓸쓸함이 막 시작된 가을날, 나름 의미 있었던 여행기이다.
아주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실패를 겪고, 또 그중 하나가 된 순간의 다음날부터 며칠을 아침부터 여기저기 떠돌기 시작했다. 지하철에 실려 덜컹거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아주 멀리멀리 실려가고 싶었다, '아주'는 아니다. 저녁까지는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 '아주'는 아니라니, 별건 아니였을까? ) 다만 그 시간 동안만 아무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는데, ‘사유의 방’으로 걸어가며 j는 말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여기로 오렴.'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그리로 갔다.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지하철을 탔다. 출근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았다. 중심지를 지나는 구간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이 더 적어졌다. 한강을 지날 때는 귀신같이 눈이 뜨여져서, 밖을 바라보았다.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않았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긴 지하통로를 따라 걷다가 출구로 나갔다.
아, 가을이구나.
늦더위가 계속되어 시간을 알쏭하게 만들었을 뿐, 나뭇잎들은 이미 노랗고 투명하게 변해 햇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로 가는 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녀노소 국적불명, 특히 어린이 단체관람객들이 많았다. 아주 가볍고 신난 움직임들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오른편 입구로 들어간다.
사유의 방
조용히 두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바라본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어떤 생각의 순간에 머문 것일까.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반가사유상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을 까? '벗을 더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진다.' 영화 자산어보 속 정약전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반가사유상은 단독 예배상으로 많이 만들어져서 같은 공간에 동시에 전시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홈페이지 참고 : 사유의 방 (museum.go.kr) )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조용한 공간에의 머무름이 좋았기 때문에, 잘 가 보지 못했던 멀리 떨어진 미술관에 가보자 생각하고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으로 향했다. 중심지에서 한 시간은 가야 하는 곳이다. 대공원역은 지하철 플랫폼부터 학생들이 많았다, 지하철을 타고 온 것은 졸업 후 처음이다. 호수를 중심으로 오른쪽 동물원 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미술관 주차 정산소를 차 마냥 통과하고 미술관 구역에 들어선다.
아-아---아'--아--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경사진 뜰 가운데 양손을 곧게 펴 내리고, 발에 힘을 주고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들고 입을 움직이며 밖을 향해 소리를 내고 있다. 몸은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서있지만 소리는 가볍게 흔들리며 무심한 듯 조금은 장난스럽게 퍼저나간다. 그 소리는 어디에서 들어도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 같은 소리다. ‘노래하는 사람’을 지나치며 미술관 입구로 들어갔다.
예약하셨나요?
'안 했는데요.' '안 하셨으면 오른편에서 예약 가능하십니다.' '무엇을 예약하는 건가요?' '이건희 컬렉션입니다.' 이런 우연한 이벤트는 항상 즐겁다. 현장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둥그런 전시장을 따라 걸으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고갱의 하늘과 바다는, 풀들은 빛에 반짝였다.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은 선이 굵고 즐거웠다. 한참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앉아서 쉬고 다시 보고 할 수 있었다.
다다익선 : 즐거운 협연
과천관에서는 백남준의 오래된 소장품 '다다익선'의 시작과 여정을 보여준다. 아카이브 전시라는 것이 재가동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탄생부터 천천히 수명을 다하는 과정과 그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고민, 선택들을 각종 행정서류, 사진, 도면, 소리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설치작품이기 때문에 건축과 협의되는 과정도 중요했는데, 손으로 그린 도면들과 타자기로 친 서류들, 옛날 실무 상황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다음번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
가운데 홀을 따라 걸으면 멈추어 있는 다다익선 흘러들어오는 햇살 사이 어디선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와 빛을 따라 돌다 보면 마지막 전시장 입구에 멈춰 선다. 그곳에 이정훈 건축가의 작품 설명 영상이 나오고 있다. 문을 열고 다시 벵글 낮은 지붕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풍경과 마주하게 되고 다시 벵글 돌아 너플거리는 구조들을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지는 해에 노래하는 사람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더 멀리 가자!
그 여세로 나는, 가보고 싶었던 더 멀리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 가기로 했다. 수장형 미술관의 전시 모습은 어떨까, 청주는 어디쯤일까, 조금 엉뚱하지만 시내버스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안까지 집에서 3시간, 천안에서 미술관까지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길안내는 말해주었다. r이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시간 바로 출발하면,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모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취업준비생이기도 한 나의 일탈여행에 KTX는 무언가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고속버스는 피하고 싶었기에 전철을 타고, 시내버스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려고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목적지까지 표를 사고, 시간을 기다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KTX의 속도로 멀어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전철과 시내버스 정도 속도에서의 흔들림이 필요했다.
이 부분은 조금(아주, 매우) 잘못했다, 버스를 타고 갔어야 했는데..
병천, 아우내
여기서부터가 내가 여행기를 쓰려고 한, 조금 우스워진 이야기이다. 천안역에 내려서 401번 버스를 타고 중간 환승하려던 정류장으로 수월하게 갔다. 버스는 도심을 지나, 논과 밭을 지나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강가를 조용히 지나갔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를 뒤늦게 검색하다가 내가 거치는 곳이 병천, 아우내 장터라는 것을 그제야 살펴보았다, 3.1 운동의 발상지. 이건 생각지 못한 것이다. 단단히 서서 피하지 말고 마주해야 한다. 어떤 단정한 마음가짐을 하고 장터와 곳곳을 구경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로 들른 것이고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에 환승정류장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정거장에 내리니 할머님들이 짐을 가득 안고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고, 한분 두 분 오는 버스를 잡아타고 가셨다. 내가 타려던 버스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즈음 지하철에서 같이 내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아저씨도 그 정류장에 와서 자리에 앉으셨다.
‘아니 왜 그냥 가나!’
버스는 금방 지나쳐갔고 일어서서 안타깝게 탄식하며 외치신 아저씨는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나도 옆자리에 앉아 버스노선을 다시 살펴보았다. 원래 타려던 버스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한번 더 갈아타고 갈 수 있는 노선이 있는데. 앗, 아저씨가 놓친 그 버스는 나도 탔어야 했던 버스였구나. 그리고 그 버스를 놓친 지금 나의 선택지에 남은 버스노선은 하나인데, 어디 보자. 하루에 한대를 운행하고 대기시간 300분이 남은 버스였다. 아저씨는 조금 있다 온 다른 버스를 타고 가셨고, 버스 정류장에는 혼자 남았다. 하루 2-3회 운행하는 버스가 올지 안 올지 모르고,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다른 방법은 보장할 수 없다. 오늘 안에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 일단 다른 방법이 없으면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 되지만 일단 지금,
여기서 멈추자.
나는 병천에서 순대국밥을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오일장을 한 바퀴 구경하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천안역으로 와서 호두과자를 한 상자 사 가지고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조금 피식 웃었다.
멀리 가는 미술관 관람은 멈추었지만, 나의 여행은 전환점을 가지고 계속되었다. 다음 날은 평소 좋아하는 수원화성 화성을 한 바퀴 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원으로 가기로 했다. 어제처럼 신설동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열차에 실려 눈을 감고 가다가 핸드폰을 꺼내 위치를 확인했는데, 나는 왠지 인천으로 가고 있었다. 인천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수원행이 아닌 인천행 열차를 탔기 때문이다. 같은 1호선인데 이렇게 천지차이로 노선이 갈라지다니 이건 아주 잘못된 일처럼 생각하며 잠시 남의 탓을 하였다. 지금이라도 내려서 분기점으로 되돌아가서 갈아탈 수도 있었지만, 인천에서 수원으로 가는 수인 분당선이 있었으므로, 별일 아니니 인천에 가서 갈아타자는 생각으로 지하철에 움직이지 않고, 실려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인천도 보고 수원도 가면 좋지 아니한가.
혼자 하는 여행
바다와 만나는 인천역은 재미있는 곳이다. 지하철 플랫폼의 끝으로 걸어가면 바로 개찰구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아무런 오르내림 없이. 이건 인천역 만이 가지고 있는 여유로움 아닐까? 어제부터 이 여행 초기의 ( 그제의 ) 나의 마음가짐은 조금 흐트러져서, 이건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여행이 되고 있었다. 내가 가려던 곳은 여긴 아니었지만.
r이 학교에 가고 바로 출발했기 때문에 인천에는 9시도 전에 도착했다. 차이나타운 상점들은 이제 몇몇 장사 준비를 시작했고, 구청 바로 앞 커피집만 문을 열었다. 거리는 한적했고, 서해에 면한 인천의 아침 햇살은 너무나 밝았다. 한적한 길을 따라다니다, 자유공원으로 올라갔다. 정상에는 뜻밖에 모든 사람들이 여기 모여있는 듯이, 이른 시간부터 축제 준비로 북적이고 있다.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9시 30분 곳곳의 관람 개장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인천시민의 집을 구경하고, 예전에 가보지 못했었던 제물포구락부와 이음 1977을 둘러보았다. 사교의 장 답게 제물포구락부는 성큼성큼 한 공간으로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잡지와 책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창가 책상에 앉아서 엽서 한 장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고, 책과 잡지를 보며 한참을 쉬다가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의 집
2020년까지 건축주가 머무셨다는 주택인 이음 1977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지금은 개방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과 안방이 있고, 계단을 요리조리 올라다니며 부엌, 작은방이 연결된다. 안방은 작은 거실 같은 개념이고 그곳을 거쳐, 더 개인적인 드레스룸과 침실, 욕실이 이어진다. 거실과 계단은 두터운 줄눈을 가진 벽돌로 되어 있고, 방은 벽지로 마감되어 있다. 창들은 모두 겹으로 되어있는데, 안쪽 반투명 창은 벽 마감 안에 포켓을 만들어서 활짝 열면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거실 창문 앞으로 옮겨주신 소파에 앉아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천만큼 혼자 하는 여행이 편안한 곳은 없을 것 같다.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보며 앉아서 쉬어 갈 수 있는 곳들이 많다. 신포시장에서 점심을 가볍게 먹고, 인천 아트플랫폼으로 갔다. ‘ 코리안 디아스포라, 한지로 접은 비행기 ’ 전시관에 들어가 보았다. 디아스포라 라는 말의 뜻을 몰랐어서, 어떤 전시인지 감이 안왔다가, 둘러보며 알게 되었다. 디아스포라 diaspora,
디아스포라(영어: diaspora)는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하였다. _위키백과
어린 시절 입양되어 성인이 된 이들의 인터뷰가 들어있었다. 어릴 적 가족들과 헤어지던 날의 기억, 남들과 다른 나를 뜯어보던 어린 날의 모습, 다시 만난 부모와의 이야기들. 모두가 끊임없는 자기만의 여행 중이다.
다프네 난 르 세르장
‘ 우리 내면의 인도를 향한 여행 ’
아트플랫폼에서 제물량로 로터리를 지나 큰길로 걸으면 그물 거리가 나오고 부두의 크레인들과 큰 배, 창고와 공장, 차이나타운 입구 조형물, 인천역,. 여러 가지 층들이 겹겹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내일은 수원에 가려고 한다.
수원역은 활기 넘쳤고, 화성도 그러했다. 사람들로 북적였고, 곳곳이 행사 중이었다. 평소 다니던 성 안이 아닌 성곽의 바깥길을 따라 한적하게 걸었다. 돌이 쌓아져 있는 모습, 그 위의 미석과 벽돌, 곳곳의 군사시설로의 성곽 장치들을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늘에서 기대어 쉬기도 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기도 하였다. 나도 기대어 앉았다. 아무것도 예정된 것은 없었고, 익숙한 것도 없었다. 화서문에서 시작했는데 팔달산 구역은 가지 았았고, 동남각루에서 내려와 미나리광시장, 못골시장을 구경하고 영동시장 팔달문을 지나 행궁동을 걸어 다시 화서문으로 돌아와서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갔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여행의 하루이다.
주말인 오늘은
빗소리를 들으며,
흰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 병천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우내 장터. 병천 순대 들어봤잖아요? '
' 흠.. 병천이라는 말이 두 천이 만나는 곳이라는 한자 같은데.. 우리말에서는 원래 두물머리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아우내라는 말은 강 안쪽이니까 어디쯤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지형인 곳인 것 같다. '
' 오잉? 그렇네, 지도 찾아보니 그렇네. 거기서 순댓국을 한 그릇 먹고 왔지. '
' 흠.. 보통은 바다나 산을 보러 갔다왔다 인데, 순대 마니아도 아니고 그 멀리 기차를 타고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왔다니, 호두과자까지. 그런 식도락 같은 얘기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
'ㅋ '
며칠 집중해서 혼자 보낸 일탈의 시간은 여러모로 소중했다. 다시 활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