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by 고양이삼거리

연립주택의 끝 세대였던 예전 집의 욕실에 작은 창이 있었는데, 높은 지대에서 멀리 북한산이 바라다보였다. 그래서 봄이 시작되는 때에, 지금이다, 곳곳에 노랗게, 붉게, 환하게 피어나는 꽃나무들을 하나씩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산수유나무가 있었지, 매실나무가 있는 곳은 산자락 평상 옆. 점점 짙어지는 산, 아침의 붉은 산을, 빛바랜 산을, 눈 쌓인 산도 볼 수 있었다. 한 겨울에는 창문을 열어두고 함박눈 내리는 날, 눈 오는 것을 바라보며 노천에서 샤워하는 기분도 낼 수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창이 없고 기계환기시스템을 가진 곳이다.


이것을 언제 껐다 켰다 할지 우리는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사용법과 같이 욕실에 들어갈 때 불을 켜면서 같이 키는가 하면, 고요한 상태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후에 켜는 방식을 쓰기도 했다. 크게 거슬리지는 않지만 소리는 있는 것이니까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새 제품으로 교체해 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일단은 그냥 사용하고 있다.


수전과 도기류들은 무난한 제품들로 수리, 관리가 편했다. 이 집은 설비 제품이 탄탄한 것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욕실도 그랬다. 눈에 띄는 것은 위치가 조금씩 어색한 액세서리들이다. 욕실 액세서리라고 하는 것들이 빠짐없이 달려있어서 신경을 썼구나 얼핏 생각할 수 있으나, 작은 화장실에 다 넣으니 과할뿐더러 위치가 애매한 게, 이어지는 벽에 너무 바짝 붙어 있거나, 이걸 어떻게 쓰는지 용도를 떠올리기 무색하게 다른 것들과 겹쳐 있거나 전혀 쓸모없는 곳에 덩그러니 붙어있다. 그러니 전 사용자는 본인의 필요에 따라서 벽에 못으로 고정해서 쓰는 몇 가지 액세서리를 추가로 설치했는데 이게 또 우리랑은 맞지 않아서 제거하고 빈 곳을 메꿔두었다.

욕실의 선반은 유리로 된 것들이 샤워부스 코너에, 세면대 위에 그리고 세면대 상부 장에 쓰였는데, 물을 쓰는 곳이니까 매끈하고 관리가 편한 재료로 유리를 쓴 것 일 테고, 강화유리를 쓰지만 그래도 타일, 도기류와 함께 있는 유리는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그 유리를 조용하게 잡아주는 고무패킹도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지거나 빠지거나 약해지기 십상이어서 덜컹거리거나 기울어진 유리면을 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 된다. 연결 철물과 패킹을 쉽게 구해서 수선할 수도 있지만, 샤워부스 코너에 삼단으로 설치된 가운데 선반 하나만 두고 철거하고, 세면대 위와 상부장 사이에 있는 것도 철거했다. 샤워부스 안 수건걸이, 세면대 위의 비누받침 두 개, 문 옆의 가운걸이는 남겨두긴 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액세서리 설치는 세심한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관성적으로 도면에 넣어 놓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필요할 때 채워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 생활 도구들로 가볍게, 적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옷을 걸고, 수건을 걸고 제대로 사용할 위치에 놓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안에서, 사용자의, 움직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깨끗하게 마감된 타일을 뚫어서 설치하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화장실 입면 그리기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게 외려 액세서리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욕실에 웃긴 부분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이게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지만, 처음에 셋다 당황한 것이 있었다. 예전 집에서 처럼 몸을 숙이면 세면대 상부장에 머리가 부딪히는 것이었다. 약간 납작한 타입의 세면대나 전면이 유리로만 마감된 상부장이나 따로 보면 무난한 제품들인데, 둘이 만나니 이런 일이 생겼다. 그걸 각자 방법으로 해소하고 있다가 내가 유리가 붙여진 두께 있는 슬라이딩 문 한쪽을 열어두겠다고 하자 얘기가 터저나 온 것이다. 몸을 충분하게 숙일 수가 없다. 나는 이마를 유리에 붙이고 쓰기도 했는데, 듣고 있던 j가 말했다. '(세면대 가운데 서지말고) 옆으로 비켜서 서면 되는데!' 아무튼 문을 열어놓으니 조금 여유가 생겼는데 다들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방법에 적응한 것 같다. 기기에 따라서 익숙한 상태가 변할 수 있구나 생각도 들고, 금방 적응하는구나 생각도 드니 맞는 위치를 찾는 게 중요하구나 한번 더 생각해 본다.


샤워기 물줄기에 닿는 타일 소리가 가벼운 게 그 속을 집작 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 구역은 옆집과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늦은 밤 화장실 갈 때마다 옆집 고양이가 울면서 아는 체를 한다. 이 귀여운 고양이는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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