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항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번에 걸은 길은 한국의 나폴리 통영입니다. 통영의 바다와 골목과 예술가들의 삶이 어우러진 남파랑길 29코스!!!
우리나라는 바다 3면을 두발로 걸어볼 수 있는 트래킹 코스가 있습니다. 동해는 해파랑길, 남해는 남파랑길, 서해는 서해랑길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맞닿은 면을 지나는 DMZ 평화의길이 있어요. 걷기 좋은 가을을 맞아 통영을 찾았습니다. 남파랑길 14, 15코스와 28, 29, 30코스가 통영을 지납니다.
남파랑길 29코스는 남망산조각공원 아래에서 시작해서 무진해변공원까지 통영의 핵심구간을 걷는 코스입니다. 약 17.6km로 6시간이 소요됩니다. 이 중에서도 남망산조각공원 입구에서 시작해서 해저터널까지 통영 도심구간을 특히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춘수와 박경리 생가는 물론 윤이상기념관과 그가 자란 동네까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촘촘히 이어집니다.
시작점에 만난 김춘수 시인의 '꽃'시비
남파랑길 29코스 시작점은 남망산조각공원 입구에 있는 아담한 쌈지공원입니다. 이 쌈지공원에 김춘수 시인의 '꽃'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통영은 소설가와 시인 그리고 음악가까지 예술인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꽃' 시비가 있는 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좁은 골목안에 그의 생가가 있습니다. 대문 안까지 들어가 볼수는 없지만 담장에 그려진 벽화와 그의 시구가 반갑습니다. 사실 김춘수 생가는 29코스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코스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들렸습니다.
골목을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높다란 언덕 위에 동피랑이 나타납니다. 동피랑은 동쪽벼랑이라는 뜻의 통영 사투리랍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좁은 골목을 따라 알록달록 벽화들이 가득합니다.
동피랑 꼭대기에 오르면 동피루가 우뚝 서있어요. 이곳이 나폴리를 닮았다는 강구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죠. 동포루에서 내려오면 동피랑 시그니처인 천사날개벽화가 있습니다.
동피랑, 세병관, 서피랑 등 통영 명소들이 주루룩
동피랑을 지나면 세병관이 나옵니다. 국보로 지정된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사영의 건물 중 하나입니다. 1605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벽 없이 기둥만 나란히 배열되어서 4면이 시원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해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통영이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병관 옆으로 담장을 따라 걷습니다. 통제사영의 담장이 끝나면 옛 성곽벽이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오래되고 빈티지한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유럽 어느 골목을 걷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서문고개를 지납니다. 돌담 옆으로 핀 국화가 반겨줍니다. 원래 코스는 곧장 큰길로 이어지지만 박경리 생가로 가기 위해 서문고개를 넘습니다. 서피랑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박경리 생가가 있는 동네는 세병관과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박경리가 보고 자랐고 그의 소설에 녹여낸 풍경이라지요
생가 골목을 빠져 나오면 곧장 서피랑공원 입구입니다. 서피랑은 통영 최고의 전망대입니다. 사방이 막힘없이 뻥 뚫린 언덕 아래로 통영이 360도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천재화가 이중섭도 이곳에서 그림을 남겼습니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을 바로 여기 앉아 그렸다고 해요. 이중섭이 그림으로 남겼던 바다를 감상하며 잠시 쉬었습니다. 이중섭은 1952년 봄부터 1954년 봄까지 통영에 머물렀는데,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전시회를 열었던 이 시기가 그의 생애 르네상스였다고 합니다.
서피랑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어머어마하게 큰 후박나무와 피아노계단 등 서피랑의 명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박경리, 윤이상 등 예술가들의 이야기 가득
서피랑을 내려오면 길바닥에 악보동판이 보입니다. 윤이상이 작곡한 학교 교가들입니다. 통영 지역 거의 모든 초등학교 교가는 물론 통영고등학교, 통영여중, 부산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심지어 고려대학교 교가까지 그가 작곡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학교 다니던 길을 따라 학교가는 길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윤이상기념공원이 나옵니다. 그이 생가 옆에 조성된 공원인데, 윤이상기념관과 소공연장이 있습니다. 전시관에는 그가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남긴 유품과 독일 정부로 부터 받은 훈장, 괴테 메달 등을 볼 수 있습니다.
통영의 풍경과 예술가들의 삶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해저터널에 도착했습니다. 1932년에 탄생한 동양 최초의 바다 속 터널입니다. 통영과 미륵도를 이어주는 길인데, 길이는 483m이고 만조일때 깊이가 13m랍니다.
지금까지 미로같은 도심을 지났다면 이제부터는 평화로운 해변길이 이어집니다. 쪽빛 바다와 나란히 걷기 좋은 길입니다. 저는 다음을 기약하고 해저터널에서 마무리 했습니다.
출출해진 배를 안고 서호시장으로 갑니다. 서호시장에는 제가 좋아하는 통영 먹거리들이 가득하니까요. 충무김밥을 포함해 우짜, 꿀빵, 회... 끝도 없습니다. 그중에 저의 원픽은 시락국입니다. 서호시장 원조시락국은 전국에 이름난 시락국 전문점이예요. 메뉴가 시락국밥 하나뿐이죠. 반찬은 직접 담아 먹도록 되어 있어요. 장어와 시래기를 넣고 가마솥에 푹 끓여낸 시래기국인데 통영에서는 시락국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뜨끈하게 국밥 한그릇 먹고 나니 피로가 싹 풀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