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평양냉면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이 평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나로서는 냉면집의 줄이 너무 길어져 이제 포기해야 하는 집들이 많아져 슬프다. 이제부터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냉면을 많이 먹으러 다니고자 한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에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조선후기 평양성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 ‘기성전도’(箕城全圖)에 보면 평양성 안에는 을밀대, 현무문, 모란봉, 부벽루, 주작문, 대동문 등의 유적지들과 함께 대동강변의 향동(香洞)에 ‘냉면가’(冷麵家·냉면집)가 표기돼 있다.
내가 처음 평양냉면을 먹은 건 2001년도 옥0냉면에서였다. 피디들과 작가들이 점심시간에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여의도에서 양평까지 40분을 달려갔다. 완자와 편육을 먹고 냉면을 먹으려는데 비냉을 시키려 하자 피디가 냉큼 참견을 했다. 여긴 물냉면을 먹어야 진짜라고.
우리 아버지는 함흥냉면을 좋아한다. 나는 중고등학교 졸업식날에도 오장동 함흥냉면집에서 수육과 냉면으로 가족 외식을 했다. 그래서 내게 냉면은 물이냐 비빔이냐가 아니라 회냉면이냐 그냥 비빔냉면이냐였다. 국물을 좋아하지 않아 국도 젓가락으로 건더기만 골라먹는 나로서는 물냉면이 그렇게 땡기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나의 첫 평양냉면은 다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으로 남았다.
다시 평양냉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지나서 마포 대흥역 을밀대였다. P는 엄청난 술고래였는데 해장으로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내 사무실이 대흥역 근처라는 걸 좋아한 이유는 을밀대 때문이었다. 집이 강남이라 일부러 와서 먹기에 좀 멀었는데 나와 만나면 을밀대에서 해장부터 하고 시작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나는 평양냉면을 별로 안 좋아해서 처음에 P는 을밀대에 들러 혼자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를 위해 딱 한 번만 같이 가자는 것이다. 살얼음이 낀 육수의 시원한 맛으로 참고 먹었지만 여전히 내게 평양냉면을 니맛도 네맛도 아닌 그냥 국수였다.
그런데, 그 며칠 후 갑자기 을밀대의 냉면이 생각나고 다시 먹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의 시처럼 수수하고 심심한 그 맛이 떠오르는 것이다.
“잊을 만 하면 생각나는 맛, 그게 평양냉면이야”
P는 내가 평양냉면에 입문하게 된 것을 무척 반겼으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헤어졌다. 내게 P는 그냥 평양냉면을 알게 해준 남자다.
이제는 잊을 만 하면 생각나서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평양냉면을 먹는다. 을지면옥, 필동면옥, 정인면옥, 진미, 능라도, 봉피양 등 서울 시내의 평양냉면뿐 아니라 의정부, 포천, 연천으로 하루 두 끼 평양냉면만으로 3박4일을 면식기행을 떠나는가 하면, 여행을 갈 때 평양냉면집을 찾는 것도 기본이다. 지방에 찾아보면 의외로 오래된 노포 평양냉면집이 많다. 어디건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집은 맛있어서 그 동네에 갈 때마다 계속 찾아가지만 어떤 집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맛없는 집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은 육향이 깊고 묵직한 육수에 약간은 거친 듯 메밀향이 은은하게 도는 면이다. 모든 평양냉면이 같은 맛 아니야, 하지만 냉면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들이 하는 냉면가들도 서로 다른 맛을 추구하지 않는가.
북에 가서 평양냉면을 먹고 온 연예인들은 그 동안 우리가 먹었던 것과 평양의 냉면이 좀 달랐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실향민들이 수십 년 전 기억을 토대로 만든 것과 진짜 평양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화한 냉면의 맛이 같을 수 없다.
내가 요즘 최고로 치는 평양냉면은 원주와 용인이다. 그러나 용인 고기리막국수는 대기줄이 2-3시간이라 이제 포기했다. 원주에는 50년 넘은 그래서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 명랑막국수가 있다. (희한하게 둘 다 간판은 “막국수”다.)
L과 나는 신(新)평양냉면맛지도를 그리겠다며 전국의 평양냉면집을 숱하게 찾아다녔으나 명랑막국수에 가장 많이 갔다. 서울 노포보다 많이 갔다. 원주에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발견한 이후로 강원도에 갈 때는 휴게소 대신 원주를 거쳐 냉면 한 그릇을 먹고 가는 식이었다. 사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니 그냥 냉면만 먹으로 가고 싶기도 하지만 냉면에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으니 일부러는 안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쉬워서 원주를 지나칠 때마다 아니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곳에 가고 핑계를 대서라도 원주에 가서 명랑막국수에 술 한 잔을 해왔다.
명랑막국수에 빠진 결정적 이유는 육수다. 처음 상차림에 동치미가 먼저 나오는데 얇고 길게 슬라이스한 무도 노란 배추속잎도 시원하고 맛있어서 이 집은 동치미 맛이 강하지 않을까 했다. 그래도 동치미 맛이 하 시원하고 좋아서 냉면이 나오기도 전에 동치미부터 동을 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냉면의 육수는 예상을 깨고 아주 묵직한 육향이 깊었다. 면도 딱 맞춤하니 메밀향이 나고 적당하니 거칠거칠하면서 부드럽게 넘어갔다.
평소에도 낮술의 출발로 좋은 것이 평양냉면인데 이 집은 정말이지 술을 참을 수 없는 집이다. 수육은 또 얼마나 보드랍고 촉촉한가. 갈 때마다 수육에 쓰이는 고기가 삼겹살, 항정살, 앞다리살로 바뀌는 것 같다. 그러나 때마다 고기의 부위가 달라도 보드랍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마도 어슷하니 써는 것이 비법 같다. 고기의 결을 어긋나게 썰면 근섬유가 끊어져 더 보드랍다. 고기의 결대로 썰면 쫄깃한 맛이 더 살아난다. 때마다 고기 부위가 조금씩 달라져도 그에 맞춤하여 써는 방식이 이 집 수육의 보드라움을 지키는 비법일 것이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고추무침도 예사롭지 않다. 집된장에 고추장과 또 다른 무언가를 섞어 검은 빛이 나는 고추무침은 아삭하니 입맛을 돋운다. 상추 한 장에 동치미의 무를 올리고 수육과 고추무침, 마늘을 얹어 한 입 가득 넣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상추에 싸서 먹는 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이면서 먹는 방법이라 했다. 이는 다만 배부름뿐이 아니라 맛에 있어서도 그렇다. 쌈으로 맛없는 것은 없다지만 이 집의 수육은 다양하게 쌈으로 먹는 것이 좋다. 물론 그냥 먹어도 훌륭하다.
입동이다. 무가 맛이 들고, 지난 겨울 동치미는 얼마 남지 않아 더욱 맛이 좋아지고 늦가을 수확한 햇메밀로 반죽한 면은 최고의 향을 내뿜는다. 육수에 쓰이는 고기도 풀을 잔뜩 먹어 최고의 맛을 낸다. 바야흐로 냉면이 가장 맛있어지는 때다. 겨울의 초입, 이가 덜덜 떨리는 추위를 참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냉면에 수육을 먹어야 할 때다. 평화의 상징 평양냉면의 인기도 조금은 사그라지는 이 때 오히려 맛집의 줄 서는 시간은 짧아지고 냉면의 맛은 최고조에 이르니 딱 좋다. 원래 냉면은 겨울의 진미다.
블로그에 보면 하나같이 맛집들이 예전만 못하다 한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예전에는 평양냉면에 꿩육수가 기본이었다 하나 이제는 꿩 대신 돼지와 소와 또 다른 무엇들을 섞어 그 맛을 지키려 해도 다를 수밖에 없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맛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변하는 가운데 지켜지는 무엇이 오래된 맛집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사람도 사랑도 변한다. 그 중에 변하지 않는 무엇을 찾는 것이 그것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노력하는 것이 사랑을, 맛을 지켜준다. 이제 P도 L도 내 옆에 없으나 나는 여전히 을밀대와 명랑막국수를 좋아하고 자주 찾는다. 사랑이 변했다고 함께 갔던 맛집까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