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 참게장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렇구나”하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여행에 있어 “Plan is just plan!”이라는 주의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도시에 여행을 가자는 대계획 이외에 여행의 일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방송하면서 아이템에 따라 일정을 짜고 변수를 계산하고 대안을 준비하고 하는 게 일이었기에 더 그렇기도 하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마치 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
한 달에 한 도시 여행을 다닐 때 도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주로 L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가고 싶은 도시를 물었다.
“정읍에 가볼까?”
“정읍에 뭐 볼 게 있나?”
L은 정읍에 가 본 적도 없고 딱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정읍사의 고장이라는 정도.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내 아버지의 고향은 정읍이다. 그래도 어려서 차멀미를 심하게 했고 미움 받는 셋째 딸이기도 해서 시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정읍에 처음 여행을 가 보고 L과 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시월 벼가 익고 단풍이 들고 관광객이 몰리는 시기라 정읍엔 알록달록 사람이 넘치게 많았고 무엇부터 봐야할지 봐도봐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결국 3박4일 동안 정읍을 이리저리 헤매기만 하고 왔다.
정읍은 내장산 단풍과 옥정호가 유명하고 이며 전라도인 만큼 음식이 맛있다. 최치원을 모시는 무성서원이 있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기 전 현감으로 있던 고을이며 삼남에서 쌀과 상업의 중심지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땅이다.
아버지 고향이니까, 시골이니까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었다. 게장도 그렇다.
나는 원조 밥도둑 게장을 무척 좋아한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도 신기해 좋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 하지 않는가. 양손을 쪽쪽 빨아가며 게살을 발라먹으면 비릿하면서도 달큰하고 촉촉한 살에 짭쪼름하니 맛있는 장, 간장이든 양념장이든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게딱지에 밥을 비벼먹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와 밥 한 그릇 뚝딱이다.
방송일 시작하고 일주일도 채 안 됐을 때 일이다. 처음으로 밤을 새워 일하고 다음 날 점심시간, KBS 신관 앞에서 김피디는 내게 메뉴 선택권을 주었다. 난 술을 마시지 않고도 술을 마신 듯 속이 시리고 몽롱하니 졸립기도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앞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을 읽었다. 간장게장! 간도 참 컸다. 아니 정말 생각이 없었다. 피디 3명 작가 4명에 나까지 8명이 평일 점심에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자고 하다니. 그래도 그 날 김피디는 날 위해 간장게장을 쏴주었고, 먼저 게딱지부터 내 밥 위에 올려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그래도 그만큼 게장을 좋아한다.
그 이후 게장은 왠지 밖에서 잘 안 먹게 된다. 누군가 사준다 해도 부담스럽다. 한 마리로는 양이 안 차고 무한리필은 싫다. 그냥 집에서 엄마가 담가주는 게장이 더 맛있고 좋다. 치아교정할 때 게장 때문에 교정기를 깨뜨려 병원에 간 일이 많았는데 원장선생님도 나중엔 “또 게장 먹었구나” 바로 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다보면 진짜 우리나라 사람들 게장 좋아하는 것을 알겠다. 고기집만큼이나 많은 음식점이 게장전문점이다. 무한리필집도 흔하며 한정식이나 고깃집에서도 게장이 반찬으로 나오는 곳이 많다.
간장게장이냐 양념게장이냐 취향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좋아해 원조 밥도둑이라 칭하지 않는가. 누가 게장을 모를까, 하지만 정읍에 가서 참게장을 먹으면서 게장의 본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
정읍에서는 어딜 가든 푸짐하고 완벽한 한상이 차려져 나왔다. 윤기 차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나물 하나 김치 한 가지도 맛있으니 모든 끼니에 대만족이었다. 그 중에도 참게장은 그야말로 일미였다.
참게장 정식에 따른 밥상은 그야말로 푸짐했다. 게장 국물에 비벼먹기만 해도 한 그릇이 뚝딱인데 조기에 된장찌개, 계란찜, 각종 나물, 김치만 해도 5가지가 나왔다. 밥 한 공기를 더 청하지 않을 수 없다. 명인이 담근 참게장이라더니 역시 맛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간장이 진짜 맛있어요”
“게장이란 게를 간장에 담가먹는 거라고 아는 분이 많은데
암게의 등딱지 안쪽에 있는 내장을 말하는 거예요.
참게장은 살이 별로 없으니까 간장맛에 먹는다 하지만 진짜배기는 게 내장이죠.”
“...”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라는 CF가 달리 나온 말이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다. 게딱지에 비벼먹는 밥을 제일로 친 이유가 바로 그 안에 노란 내장 때문이지 않은가.
다시 한 번 참게장의 등딱지에서 노란 내장을 그러모아 밥 한술에 얹어 먹는다. 톡 쏘는 특유의 향과 함께 부드럽고 보들보들한 장의 맛에 비하면 게살은 그저 조연일 뿐이다. 그 동안 게장의 장이 간장이나 양념장이라 자동적으로 생각한 내 아둔한 머리는 무엇인가. 국문과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부끄럽다.
게장에 대해 찾아보니 본래 “게도 바다에서 잡히는 꽃게는 쳐주지 않는다. 논두렁이나 개울가에서 잡히는 참게가 오직 젓담그기에 족한 게이다”라 한다.
“게는 예로부터 중국의 대문호들이 내황후(內黃候), 무장공자(無腸公子), 곽색(郭索)이라 부르며 술자리의 으뜸 안주로 꼽아온 요리이다. 내황후란 게의 별칭이다. 굳은 껍질 안에 황색 게장이 들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무장공자는 게에 창자가 없음을 두고 한 말이며, 곽색은 다리가 많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이다.” (김정호, <조선의 탐식가들>)
조선의 탐식가들이 게의 집게다리를 최고의 안주로 친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됐는데 그들이 먹는 게는 바다의 꽃게가 아니라 냇가에서 잡은 민물참게였다. 몸통에 살이 거의 없는 참게는 노란 게(내)장에 밥을 비벼 먹고, 술안주로는 집게다리가 최고인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에서 성종까지 무려 6명의 왕을 모셨던 대 문호 서거정도 게의 맛에 대한 시를 남겼다.
옥 집게다리 황금껍질 빛나는 내황후는
그 풍미가 진정 강호의 제 일류이고 말고
L과 나는 정읍에 다녀온 이후 여행에 대한 계획과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한 달에 한 도시 여행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몇 년 행복한 여행을 함께 했다.
그러나 진짜 몰랐다. 서로 취향이 같고, 여행길 메이트로 최고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L과 헤어질 때까지 한 번도 싸우지 않은 것은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 저 사람도 나와 같을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는 것을.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것보다 잘 싸우는 게 더 중요하다. 그와 싸워야 할 때 잘 싸웠다면 그래서 서로에 대해 정말 잘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계속 같이 여행을 다니고 더불어 함께 맛있는 것을 먹었다면, 이런 글도 남기지 않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