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친구와 애인 사이

한로, 새우

- 어떤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 뜨겁고 열렬한 사랑 다 필요 없어. 해 봤잖아. 결혼은 그냥 친구 같은 사람이랑 해서

같은 취미활동 하면서 동료처럼 살면 좋지 않을까?

- 나랑 하면 되겠네

- ....

- 5년 후에도 둘 다 싱글이면 우리 결혼하자!


제철음식은 때로 그런 게 아닐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오래 된 단골집 같은 것. 자주 찾지 않아도 내 마음이 동할 때만 찾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기다려 주는 단골집.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특정한 때가 되면 저절로 마음이 동하고 엊그제도 찾아갔던 것처럼 하하호호 웃으며 요란스럽게 가서 맛있게 먹는 것. 그러다 어느 날 사라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내가 “기다려” 하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서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있어주는 게 단골집, 제철음식의 숙명이니까.


10월이면 전국은 축제로 들끓는다. 관광주간이 생기기 전부터 그랬다. 10월은 1일 국군의 날을 시작으로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이다. 거기에 추석이 그 중간에 끼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황금연휴가 된다. 게다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천고마비의 계절, 단풍시즌이 시작되니 가을은 여행하기에도 딱 좋은 것이다. 국군의 날과 한글날이 휴일에서 제외되고도 그랬다. (한글날은 2006년 다시 휴일로 지정되었다)


내 생일은 이 한가운데 있다. 10월 4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친구들과 만나기 쉽지 않았다. 휴가를 가거나 약속이 많은 시즌이기 때문이다. 한 동안은 무조건 대하축제장에서 내 생일파티를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대하를 사랑했고, 대하는 술 마시기 딱 좋으며, 생일이라 하면 서비스도 많이 준다.


대하는 오랜 세월 내 생일의 특식이므로 평소에는 잘 먹지 않았다. 대하축제장에 가면 대개 생새우 회로 시작해 소금구이, 튀김, 새우라면까지 풀코스로 먹는다. 대하가 맛있기는 하나 그렇게 한두 번 먹고 회식하면서 먹고 하다 보면 또 다음 해까지 안 찾게 된다. 대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뭐.


서른이 넘으면서 생일 따위 잘 챙기지 않는데도 H는 내 생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생일날이 아니어도 그 전이나 후로 일주일 사이에 꼭 한 번쯤 나타났다. 연극이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대하구이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H는 나와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친구다. H는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몸에 얼굴이 까맸다. 달리기를 잘했다. 13년 만에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그 때 그 시절의 친구들이 모였을 때 다시 만났다. 일을 마치고 밤 11시 약수동의 호프집에 도착했는데 600명의 동기동창 중 250명 정도가 있었다. 이내 같은 반을 중심으로 몇몇 모임들이 생겼다 사라지고 회장을 자임했던 친구가 부회장과 결혼을 하더니 만남은 흐지부지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삼성동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H를 만났다. 나는 그곳 사무실에 첫 출근한 날이었는데 H의 건물과 5분 거리였다. 알고보니 우리는 집도 가까웠다.


H는 프로그래머였는데 취직이 좀 늦었다. 종종 ‘사회생활이 원래 이래?’ 라거나 ‘대학로에서 소개팅을 할 건데 코스 좀 짜줘’ 라거나 ‘내 여자친구가 말이야...’하며 자주 전화를 걸었다. 주로 밤늦게. 그런 건 네 여자친구에게 물으면 안 되겠니, 하면 자기 여자친구는 피부미용을 위해 이 시간에는 자야 한다는 식이었다.


동창들은 H와 나를 처음엔 의심하다가 어느 새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그 상태 그대로 따로 또 같이 연애를 하고 서로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기도 하면서 각자의 애인과 상관없이 또 잘 노는 우리를 그냥 별종이라 생각했다.


H와 나는 잘 지냈다. 술에 취하면 집에 업어다주기도 했고, 산 정상에 처음 같이 올랐으며, 어린 시절 살던 약수동에 놀러가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단골집과 맛집을 서로 알려주었다. 가족의 허물과 욕도 공유했다.


우리는 친구와 애인 사이의 어느 정도에서 너무 가까워지거나 너무 멀어지지도 않고 나란히 달리는 평행선 같았다.


10월이다. 대하철이 돌아왔고 생일이 지나 또 한 살 나이를 먹었으며 그 많던 단골집은 죄다 없어졌다. 그리고 H가 죽었다.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하가 내년에 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그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대하를 즐기고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에게 마음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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