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송이와 소고기
스페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언니가 트러플 발사믹을 선물해 주었다.
트러플 발사믹은 샐러드는 물론 그냥 올리브오일에 섞어 빵만 찍어 먹어도 맛이 환상적이다. 얼마 전 컵라면에 발사믹 식초를 살짝 넣으면 맛있다는 방송을 엄마가 보고 얘기해 주길래, 라면에 넣어보니 감칠맛이 폭발한다. 경상도나 제주에서 국에 빙초산 등을 넣어먹는 것도 같은 원리일까? 라면에는 랍스타, 독도새우, 트러플 등 그 비싼 무엇을 넣어도 잘 어울리는 요상한 마력이 있다.
세계3대 진미 중 하나로 손꼽히는 트러플은 1kg에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소량만 들어가도 음식 전체의 맛이 확 바꾸어 놓아 유럽에서도 인기인데,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냉장고 속 재료로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찾는 이가 많다. 워낙 비싸서 셰프들도 트러플은 금고 속에 보관한다지만 오일이나 발사믹, 소금 등 트러플이 가미된 식품은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한국 셰프들이 송이를 잘 모른다. 예전에 울진 송이 취재를 하러 가기 전날, 모임에서 셰프를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서양의 트러플은 간혹 사용해도 한국 송이는 아예 먹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후로 셰프를 만날 때마다 한국 송이를 물어보면 잘 모르거나 알기는 해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럴까?
경북 울진, 우리나라 최대의 생태경관보존지역인 왕피천이 한 바퀴 휘돌아 나가는 곳에서 아홉 고개를 넘어 들어선 산촌마을에는 아직까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백로에서 10월 중순까지 일 년에 딱 한 달, 앞산과 뒷산에서 송이를 캔다. 최근 몇 년 사이 기후 변화로 더 귀해져, 아예 구들장을 짊어지고 올라가 방을 만들고 송이철 한 달은 바로 아래 집에도 내려오지 않고 산에서 보낸다.
“아들은 그만 하라 하지만 송이 따는 게 얼마나 재미진데.
낮에는 돈(송이) 줍고, 밤에는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모래등 송이를 먹어선가 무릎도 아직 쓸 만해.”
하루 산에서 따오는 송이가 15~30kg. 최상품 A등급이 1kg에 40만원을 넘나들고 갓이 다 피어버린 등외품(D)도 13만원을 넘으니 그야말로 산에 가서 돈을 줍는다. 송이는 갓이 피지 않은 1등급부터 완전히 갓이 피고 상처 입은 등외품까지 4등급으로 나뉘는데 맛과 향의 차이보다 보기 좋은가의 차이가 더 크다. 물론 갓이 완전히 피지 않은 쪽이 더 연하지만 등외품도 향과 맛으로 크게 밀리지 않는다.
감히 신선만이 먹을 수 있다는 귀한 송이. 내가 땄어도 내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 재산인데다, 소고기보다 비싸니 송이를 캐는 송이꾼들도 송이를 먹는 것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만 할 수 있단다.
마을 이장님은 취재를 위해 왔다는 나를 비탈진 산길, 모래등이라 미끄러워 넘어지기 쉬운 길로만 골라서 끌고 가신다. 송이를 직접 보여주고 싶으셨다는데 송이가 그리 쉽게 발견되지는 않았다. 할머니들은 오전 작업을 마치고 밥 드실 준비 중이었다. 송이 맛을 보라며 하나를 결대로 찢어주신다.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버섯보다 깊고 진한 맛에 아작아작 씹을수록 향이 좋다. 소고기보다 비싼 이유를 알겠다. 그윽한 솔향기와 짙은 땅 내음 그 이상의 무엇이 엄청나게 응축되어 있다. 이어서 은은한 숯불에 구운 송이구이, 장아찌, 국까지 송이밥상을 차려주신다. 감자 섞어 지은 밥을 한 그릇 뚝딱 먹었다. 이럴 때 방송작가로 일하는 보람이 있다.
마을로 내려와서 체험학습 온 친구들 따라 송이 칼국수도 먹었으니 이 날 하루 먹은 송이가 도대체 얼마치인가 계산이 안 된다. 그 날, 등외품으로만 약 2킬로그램을 사왔다. 내가 언제 또 송이를 맛보겠는가?
결국 송이마을 방송은 하지 못했다. 아이템도 취재 내용도 좋았고, 마을 이장님과 할머니들도 모두 좋았는데,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추석까지 며칠 남지 않았는데 벌써 송이는 끝물이었다. 다큐 60분을 위해서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촬영을 해야 하는데, 답사 바로 다음날 제작진을 보내도 촬영일수가 부족하다. 부장님의 컨펌도 떨어지지 않았다. 무리해서 진행하기엔 울진이 너무 멀고 촬영지가 위험해서 아무나 보낼 수도 없었다.
방송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내게는 송이버섯이 남았다. 이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 우선 집에 오자마자 부모님과 구워 먹었다. 결대로 쪽쪽 찢어 굽고, 고기에 곁들이고, 삼계탕에 넣어서 먹었다. 신문지에 하나씩 싸서 김치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두고두고 한 달을 먹었다.
다음날, L을 만났다. L은 당장 고깃집을 예약해놓고 기다렸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니 마침 좋은 한우가 있다고 추천한다. 마블링이 너무 많지 않은 적당히 육향이 강한 등심이었다. (며칠 친구들과 송이 파티를 벌여보니 기름진 꽃등심보다는 토시살과 같은 특수부위가 더 잘 어울렸다.) 송이의 묵직하면서 그윽한 향에 소고기의 육향이 잘 어울렸고, 씹는 맛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소고기가 살살 녹는다면 송이는 쫄깃함이 더 좋았다.
때는 가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니 이때의 제철 음식으로 버섯을 꼽는다. 양식으로 재배되는 버섯들을 사시사철 즐길 수 있으나 자연산 버섯의 향취와 비교할 수 없다. 소고기는 언제 먹어도 진리다. 그러나 제주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셰프는 소고기를 가을에 먹으라고 했었다. 소는 주로 사료를 먹이지만 풀도 많이 먹는데 겨울에는 풀이 없어 사료만 먹으니 봄부터 가을까지 풀을 같이 먹은 가을 소가 좀더 맛이 좋다는 것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술꾼들도 신나는 가을날, 한우에 송이버섯을 구워 술을 마시니 참 좋다. 음식은 궁합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 엄마는 그 며칠 전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 바람에 송이를 몇 점 못 드셨다. 덕분에 L과 친구들이 신났다.
생각해보면 방송도 사랑도 타이밍의 예술이다.
아, 입에 침이 고인다. 우선 라면에 트러플발사믹을 넣어서 먹고,
송이버섯 축제에 함께 갈 친구를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