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주꾸미
메리는 아주 어린데다가 늘 누군가한테서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여느 때처럼 또 누군가가 자기를 돌봐주리라고 지레 짐작했다.
-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비밀의 화원>
언제나 연애를 하고 있거나 방금 연애를 끝냈거나 혹은 새로운 연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도 연애가 끝나고 다음 연애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휴지기가 필요하다. 지나간 사랑과 다가올 사랑에 대한 예의로.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휴지기를 가져도 사랑은 또 왔기에 누군가 또 내게 찾아오리라 생각하지만 <비밀의 화원>의 메리보다 좀 많이 나이를 먹은 요즘은 혼자 이렇게 외톨이로 남을까 무척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백로는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라고 한다. 그런데 이맘때 제철 음식이 조금 아쉽다. 봄과 마찬가지로 가을 들어서는 초입에는 딱 맞춤한 제철 음식이 아직 맛이 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금어기가 끝나고 맛이 들기 시작한 주꾸미는 어떨까?
해양수산부는 연간 어획량과 어획물의 크기를 제한할 뿐 아니라 어패류(魚貝類)의 산란기나 치어기(稚魚期)에 맞추어 기간 ·구역을 한정하여 설정한다. 주꾸미는 5월부터 8월까지 금어기다. 보통 주꾸미는 3-4월 봄에 어부들이 소라방 등의 조업이나 조개처럼 개펄에서 잡고 가을에는 주로 낚시로 잡는다.
사실 나도 방송을 하면서 봄 주꾸미와 샤브샤브 맛집을 많이 소개했었다. 낚시꾼들보다 어부들이 많이 잡는 봄이 제철이라고 방송했던 것이다. 그러다 얼마 전 SNS 친구의 글을 보고 반성이 됐다.
주꾸미는 1년 생으로 봄에 태어나 이듬해 봄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주꾸미의 산란기는 3-4월이니 5-8월 금어기는 유명무실이다. 치어를 키우는 효과는 있겠으나 알이 꽉 찬 주꾸미를 닥치는 대로 먹어버리면 주꾸미가 언제 우리 앞바다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다.
주꾸미, 낙지, 오징어 같은 두족류는 모두 열과 상극이다. 뜨거운 불에 오래 굽거나 삶으면 질겨져서 맛이 없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맛에 먹기 때문에 살짝 데쳐서 먹거나 구이나 볶음, 샤브샤브 등으로 많이 먹는데 특히, 봄의 주꾸미는 알이 꽉찬 머릿속의 밥풀이 샤브샤브로 먹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방송하곤 했다.
나도 봄에 주꾸미를 먹어왔다. 오징어나 주꾸미볶음은 잘 사먹지 않는데 몸통과 다리를 한 번에 조리해 다리는 질겨질 뿐 아니라 주인공보다 조연인 양배추와 양파가 더 많아서다. 그러나 봄날 주꾸미샤브샤브는 도다리쑥국보다 더 애정한다. 특히 육수에 쑥과 함께 샤브샤브로 먹는 주꾸미 쑥국은 최애 안주다.
연한 육수에 무와 쑥을 넣고 좀 끓이다가 주꾸미의 머리부터 넣어 익힌다. 다리는 그야말로 젓가락으로 집은 채 살랑살랑 데치듯 익혀 바로 먹으면 좋고, 머리는 좀더 시간을 두고 먹는데 먹물이 터지면 검은 색이 좀 그렇지만 맛은 더 좋다. 머릿속의 밥풀도 색다른 맛으로 즐겨먹었다.
주꾸미 쑥탕을 처음 맛 본 것은 전주에서였다.
출장 간 남친을 따라 전주까지 간 것은 순전히 막걸리 때문이었다. 전주에는 막걸리 다찌방이 있다. 통영의 다찌방처럼 막걸리를 시키면 안주가 따라 나온다. 6천 원짜리 백반도 한정식 부럽지 않은 전주 아닌가. 막걸리 네 다섯 주전자면 간장게장밥도 나온다. 전주 다찌방에 한 번 가보니 다른 맛집보다 다양하고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 좋아 했다.
Y는 목수였는데 영화와 광고 현장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목수, 나무뿐 아니라 용접도 하고 집도 짓고, 한옥 해체해 옮겨 짓는 일도 따라다녔다. 난생처음 남자친구의 직업이 부러웠다. 광고 촬영은 하루에 세 대가리까지 쳐서 일당이 육십도 넘는다는 것을 알고 더 그랬다. 이런 신의 직업 같으니라고. 지금도 ‘목수’라고 하면 나는 한 번 더 쳐다본다. 멋지잖아, 돈도 잘 벌고!
어느 날, Y가 전주로 출장을 가는데 열흘쯤 걸린다 했다. 출장 한두 번도 아니고 잘 다녀와 했더니, 그래도 보통 2-3일인데, 열흘은 너무 기니 가지 말까 한다. 이 놈이 미쳤나 (처음 사귀어 본 동갑 남자친구, 게다가 모임에서 오래 알았기에 막말도 편했다) 전주면 드물게 들어온 한옥일일 텐데 맘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말고 돈 벌라고 했더니, 일주일 후에 내려오면 안 되겠느냐고 한다. 오케이! 일주일이면 좋은 막걸리집 단골 만들어 두겠지~ 모든 맛집을 뛰어넘는 것은 단연코 단골집이다.
일주일 후, 전주에 가서 Y가 그 동안 동료들과 함께 들락거리며 안면을 터놓은 막걸리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해산물만 안주로 내놓는 다찌방이 있다며 속는 셈치고 한 번 가보라고 안내해줬다.
횟집처럼 밖에는 수족관이 있고 테이블 가운데 화구가 있는 막걸리 다찌방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깔리는 안주가 남달랐다. 가짓수는 좀 적어도 싱싱한 해산물에 막걸리의 조합에 술이 술술 잘 넘어가는 것이다. 두세 주전자를 먹고 나니 쑥과 무만 잔뜩 든 국물이 나오고 거기에 주꾸미를 샤브샤브해 먹으라 했다. 이후 도다리쑥국보다 애정하는 주꾸미쑥탕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집 말고는 그 안주를 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맛있는 걸 왜 안 하는 걸까. 대신 친구들과 봄에 놀러가거나 하면 해먹는 비장의 봄철 레시피였다.
그러나 이제 주꾸미쑥탕과의 이별을 고한다. 국민생선 명태가 사라지고 꼬막의 씨알이 점점 작아져 먹을 게 없어지는 요즘, 주꾸미마저 사라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가을의 맛이 드는 무와 배추, 버섯도 샤브샤브에 잘 어울린다. 게다가 봄 주꾸미가 알에 모든 맛이 집중해 알을 진미로 친다면, 가을주꾸미는 몸통에 맛이 꽉 차있어 더 야들야들 맛있다.
사랑도, 맛있는 술상도 때로 양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